[시(詩)와 사색] 기억하는가

2024. 6.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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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가
최승자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89)

제법 긴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습니다. 무겁게 쌓인 일상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비우고 싶었습니다. 챙겨야 할 물건의 목록을 노트에 미리 적어두었고 조목조목 빗금을 그어가며 가방을 꾸렸습니다. 창문이 열린 곳은 없는지 둘러본 다음 전기도 가스도 모두 껐습니다. 그렇게 동네 어귀를 빠져나올 무렵 오랫동안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다시 차를 돌렸습니다. 힘없이 늘어진 화초, 한가득 물을 주니 꼴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치 원망처럼. 살아가다 보면 잊어야 할 일이 있고 잊지 말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잊어야 할 일에 사로잡혀 잊지 말아야 할 일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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