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옥의 말과 글] [359] 다시 보기

백영옥 소설가 2024. 6. 2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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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들과 최신 개봉 영화 얘기를 했다. 나는 보지 못한 영화였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신작 영화와 신간을 거의 다 챙겨 보는 편이었다. 일종의 직업적 강박인 셈이다. 하지만 넷플릭스 같은 OTT 서비스와 함께 콘텐츠의 양에 압도되면서부터 곧 길을 잃기 시작했다. 가끔 스스로 너무 많은 음식이 적힌 메뉴판 앞에서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당황한 외국인 여행객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보르헤스의 말’에는 나처럼 압도적인 양에 질려 갈 곳 잃은 사람에게 주는 지혜가 있다. “책 읽기보다 훨씬 좋은 건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이란 말이다. 양을 압도하는 건 깊이라는 현자의 시각이다. 그렇게 매해 1월 1일이 되면 나는 쉼보르스카의 시 ‘두 번은 없다’를 두 번씩 소리 내어 읽고, 10년마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달라진 밑줄을 확인한다. 세월을 통과하며 내가 얼마나 바뀌었는지 가늠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종종 댐이 무너지듯 쏟아지는 콘텐츠 홍수의 흙탕물 속에서 무엇을 읽고, 보고, 들어야 할지 헤맬 때가 있다. ‘오메가3′ 섭취가 몸에 좋다는 뉴스와 나쁘다는 뉴스 사이에서 그렇게 길을 잃는다. 그때마다 등대의 불빛을 찾듯 오랫동안 반복해서 본 책과 영화를 떠올린다. 가령 그냥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 같은 제임스 길버트의 시 구절은 여기저기 구겨진 나를 펴준다.

집에 있는데도 집으로 퇴근하고 싶은 마음. 이 동어반복의 모순 속에 쉬고 있는데도 여전히 쉬고 싶은 현대적 피로와 불안의 실체가 숨어 있다. 그때마다 만화 ‘빨간 머리 앤’을 멍하게 본다. 목청껏 주제가를 부르며 ‘빨간 머리 앤’을 보던 어린 시절의 따뜻함이 나를 보호해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안전함을 찾아 나서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읽은 책, 본 드라마를 다시 보며 풍요와 행복을 느낀다면 그것이 나의 안전지대란 뜻이다. 많은 것이 빠르게 바뀌고 허물어질 때 우리가 되새겨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바뀌지 않을 나만의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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