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준 칼럼]일본 언론과 시민은 왜 파업을 응원하는가
반발한 노조, 절제된 ‘1일 파업’에 여론도 지지
취업 빙하기 이후 ‘고용 안정이 善’ 사회적 합의
매각사-인수사, 고용 유지 약속에 큰 갈등 없어
이토요카도는 일본의 슈퍼마켓 체인이다. 1920년 도쿄에서 문을 연 양품점에서 출발했다. 일본에서 처음 편의점 사업을 시작한 것이 이 슈퍼마켓 체인이다. 1974년 미국 업체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도쿄에 세븐일레븐 1호점을 냈다. 편의점 사업은 아예 미국 본사를 매수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2005년에 지주회사인 세븐앤드아이홀딩스를 세우고 이토요카도와 세븐일레븐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1년 뒤 유명 백화점 체인인 세부와 소고를 매수했다. 지주회사 밑에 슈퍼, 백화점, 편의점을 둔 일본 최대 소매·유통업체가 탄생했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가 증가하는 사회에서 편의점 사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가 심화하면서 백화점과 슈퍼마켓 사업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지난 수년간은 거의 매년 적자의 연속이었다. 결국 슈퍼마켓은 점포 수를 줄이는 등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소고·세부 백화점은 아예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2022년부터 미국의 한 투자회사와 매각 협상이 진행되었다. 불안을 느낀 소고·세부 백화점 노동조합은 매각에 반대하며 지주사와 대립했다. 노동조합은 백화점 사업의 지속과 고용 유지를 요구했지만 지주회사는 고용 유지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매각을 최종 결정하는 이사회가 열리는 2023년 8월 31일, 노조는 세부 백화점의 상징과도 같은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하루 동안 파업에 돌입했다. 일본에서 백화점 노조의 파업은 61년 만의 일이다. 파업을 전후해 일본 모든 언론의 시선이 이케부쿠로에 쏠렸다. 이케부쿠로는 신주쿠, 시부야에 이어 도쿄에서 세 번째로 큰 환승역이다. 세부 이케부쿠로점은 수십 년간 이케부쿠로의 얼굴과 같은 존재였다. 언론은 파업에 호의적이었다. 시위에 나선 조합원들의 행렬, 그들의 호소, 시민들의 우려와 응원이 연이어 TV 화면을 채웠다. 파업으로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는 노조원들의 공손한 사과도 방송을 탔다. 통상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력 경제지도 사설에서 매각은 잘못된 결정이 아니지만 사원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며 지주사를 나무랐다. 그 사설의 마지막 부분이 인상적이다. “사업 재편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인적 자산이나 이해관계자에 대한 배려가 기업 가치 향상에 필수적임을 명심해야 한다. 소고·세부의 파업이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노조의 파업에도 불구하고 매각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파업이 있던 8월 31일 이사회에서 매각이 결정됐고, 하루 뒤 인수자인 미국 투자회사 책임자가 참여한 노사 협의가 열렸다. 투자회사와 세븐앤드아이홀딩스는 백화점에서 소화할 수 없는 인원은 세븐앤드아이홀딩스 자회사를 최대한 활용해 재배치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노조의 불안감을 완전히 불식시키지는 못했지만, 매각한 측과 인수한 측이 공동으로 고용 유지를 약속한 셈이다.
세부 이케부쿠로 본점은 지금 리모델링 중이다. 내년 1월에 다시 문을 연다. 어떤 모습으로 거듭날지 언론의 관심이 크다. 고용은 약속대로 유지된 것일까? 내부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외부로 표출되는 큰 갈등은 아직 없어 보인다. 어쩌면 지금 일본의 고용 환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기 때문에 스스로 이직을 선택한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한국인 경제학자의 눈에 소고·세부 사태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파업을 단 하루 만에 끝낸 거나 백화점을 인수한 측에서 매각한 측의 협조를 받아 고용 유지를 약속한 거나 고용 재배치에 노조가 크게 반발하지 않은 것도 기이했지만, 언론과 시민이 파업을 응원하는 게 가장 기이했다. 그러나 그 사태를 지켜보며 일본 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대규모 정리해고, 역사적 청년 실업, 취업 빙하기, 히키코모리를 겪으며 이 나라에서는 고용을 지키는 게 선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졌구나. 시민이 공감하는 방식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그 선을 요구하는 노조는 시민과 언론의 눈에 응원이 필요한 약자였다. 이 나라 노조가 오랫동안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않은 것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고용 안정이 임금 인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구나. 파업이 있던 날 기사에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직업상 가장 공손한 사람들이 가장 눈에 띄는 저항을 보였다며 놀라워했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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