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총선 '반유대주의' 격랑 속 '무슬림 혐오'…극우는 일거양득
이달 초 유럽의회 선거에서 집권당이 극우에 참패한 뒤 조기총선을 치르는 프랑스에서 12살 유대인 어린이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며 반유대주의가 화두로 떠올랐다. 반유대주의 이력 지우기를 시도 중인 지지율 1위 극우 정당이 유대인 옹호를 통해 무슬림 혐오를 강화해 이득을 누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프랑스 매체 <르몽드> 영문판을 보면 20일(이하 현지시간) 파리에서 이틀 연속 인종차별 반대 단체, 페미니스트 단체 및 인권단체 등이 참여한 수백 명 규모의 '반유대주의 및 강간 문화'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는 지난 14일 파리 교외에서 12살 유대인 소녀가 또래 소년들에게 집단 강간 당한 사건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열렸다.
관련해 13살 소년 2명이 피해자를 집단 강간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했으며 종교에 대한 모욕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또 다른 12살 소년도 사건에 연루돼 반유대주의 모욕 및 폭력, 살해 위협 혐의를 받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가해자 중 한 명은 범행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이스라엘에 관한 질문"을 하고 "더러운 유대인"이라고 모욕하기도 했다.
시위에 참여한 24살 유대인 여성 네르 스페즈는 "성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교차점"인 이 범죄에 항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밝혔다.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는 가자지구 전쟁 뒤 이스라엘이 국제적 비난을 받는 틈을 타 확산되고 있다. 프랑스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폭력, 위협 등을 포함한 반유대주의 행위가 1676건 신고됐는데 이는 그 전해 436건에 비해 4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지난해 발생한 반유대주의 행위 대부분이 10월7일 가자지구 전쟁 발발 뒤 일어났다. <뉴욕타임스>(NYT)를 보면 프랑스 정부는 올해 1분기에도 360건 이상의 반유대주의 사건이 발생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배나 증가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7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를 습격해 1200명 이상을 죽이고 240명 이상을 납치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를 공격해 가자지구 보건부 집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 3만7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자행된 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부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이력이 있는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는 민감한 사안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 인구(44만 명)를 보유 중이며 동시에 서유럽에서 가장 무슬림 인구가 많은 국가로 인구의 8%가 넘는 570만 명의 무슬림이 거주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총선을 앞둔 프랑스 정치권은 이번 사건을 반유대주의 범죄로 규정하고 일제히 비판했다. 프랑스 집권 여당의 가브리엘 아탈 총리는 19일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피해자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2살에 강간 당했다"고 규탄했다.
<로이터> 통신을 보면 19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혐오 표현이 학교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학교에서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에 맞서는 토론을 조직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마크롱 대통령의 중도 정당은 극우, 좌파 연합에 밀린 지지율 3위에 불과하다. 20일 <로이터>가 인용한 현지 여론조사들을 종합하면 극우 국민연합(RN)이 33~35% 지지율로 1위를 달리는 반면 마크롱 대통령 정당 지지율은 20~22%로 2위인 좌파 연합 신인민전선(NFP) 지지율(26~29%)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지지율 1위인 극우 또한 반유대주의를 비판하고 있지만 국민연합은 마린 르펜의 아버지 장 마리 르펜이 이끌던 당시부터 반유대주의 전력이 있다. 장 마리 르펜은 1987년 홀로코스트를 2차 대전 "역사의 세부 사항"으로 경시하는 발언을 해 비판을 받은 뒤에도 해당 발언을 반복하는 등 계속된 유대인 혐오 표현으로 여러 차례 유죄를 선고 받았다.
반면 2011년 당을 장악한 마린 르펜은 유대인 혐오 발언을 일삼는 아버지를 당에서 축출하는 등 반유대주의 이미지를 없애려 애썼다. <AP>를 보면 현재 국민연합 대표인 조르당 바르델라는 이번 성폭력 사건 뒤 총선에서 승리하면 "10월7일 이후 프랑스를 괴롭히고 있는 반유대주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다. 과거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자신의 당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도 밝혔다.
현재 프랑스 극우의 반유대주의 탈피 움직임은 이들의 핵심 소구 지점인 반이민 수사와 그에 따른 무슬림 혐오와 통한다. 지난해 말 10만 명이 운집한 프랑스 반유대주의 집회에 참석한 마린 르펜은 해당 집회가 "이슬람 근본주의"와도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AP>를 보면 지지율 2위 좌파 연합에 포함된 강경 좌파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도 이번 성폭력 사건을 "반유대주의적 인종차별"이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굴복하지않는프랑스는 이미 프랑스 내 유대인들에게 반유대주의 정당으로 낙인찍혀 있다. 가자지구 전쟁 뒤 프랑스에서 급증한 반유대주의 움직임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하마스를 테러 조직으로 부르는 것을 꺼리는 등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유다.
굴복하지않는프랑스를 이끄는 장 뤽 멜랑숑은 지난해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반대 집회 참여자들을 가자지구에서 일어나는 팔레스타인인 "학살을 무조건 지지하는 이들"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무슬림 혐오를 일삼는 극우에 비해 강경 좌파는 이민자 및 무슬림 공동체에 지지 기반을 두고 있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유럽판을 보면 20일 아탈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성폭력 사건을 두고 "이러한 비극에 직면해 장 뤽 멜랑숑을 포함해 모든 주요 정치인들이 이를 비난할 것"이지만 반유대주의 행위를 막기 위해 "정치 지도자와 정당은 장벽을 세워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멜랑숑의 소극적 대응을 에둘러 비난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총선이 유대인 유권자들에겐 이미 "악몽"이라고 평가했다. 나치 전범 추적에 공헌한 프랑스계 유대인 역사가 세르주 클라스펠트는 이번 총선에서 "반유대주의" 에 잠식된 "극좌"에 대항해 "유대인과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국민연합에 투표하겠다고 밝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신문은 클라스펠트가 2022년엔 "반유대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딸 마린 르펜"에 대한 투표에 반대하는 현지 언론 기고의 공동 서명자였다고 설명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반면 프랑스 내 주요 유대인 조직인 프랑스 유대인단체대표회의(CRIF)의 요나단 아르피 대표는 20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유대인 역사를 통해 포퓰리즘이 어떤 대가를 치르는지 알고 있다. 오늘날 국민연합 지도자들이 무슨 말을 하든 포퓰리즘은 반유대주의에 대항하는 방어막이 된 적이 없다"며 국민연합 지지를 거부했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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