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이면] 중국 국보 1호가 품은 비밀

2024. 6. 2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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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변경지역 청명절 풍경 그린
'청명상하도' 가장 중요한 국보
800여명 인물 사실적 표현
명·청 시대에 여러 번 모사돼
조선후기 그림 '태평성시도'
中 모방했지만 3배 이상 크고
도시생활과 문화 세세히 담겨

중국의 국보 1호는 무엇일까. 석탑이나 불상, 휘황찬란한 건축물이 아닌 바로 그림이다. 북송 시대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다. 북송은 동경, 남경, 서경, 북경 네 개의 경성을 둔 '사경제(四京制)'를 실시했다. 이 중 동경은 '개봉(開封)'으로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시다. 옛 '변주'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동경을 '변경'이라 불렀다. 바로 이 변경의 청명절 풍경을 그린 것이 청명상하도다.

이 그림이 무엇이기에 국보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그림의 사료적 가치 덕분이다. 장면과 인물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높이 30㎝에 길이 5m에 이르는 이 대작에는 총 800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제각기 생동감이 넘친다. 인물 하나에 고작 1~2㎝ 크기로 그려야 했지만 작가는 그 사람들이 처한 현실과 심정을 전부 잘 살려놓았다.

그런데 제목의 '청명'이 겨울을 지나 만물에 물기가 도는 절기인 청명절을 뜻한다면 '상하'는 무슨 뜻일까? 이건 역사를 좀 알아야 한다. 북송 시기(960~1127)에 중국은 소빙하기에 접어들어 기온이 낮아졌다. 절기상 봄이 와도 날씨가 따뜻하지 않았다. 낮에 잠깐 온화하다가 밤에는 다시 칼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우수, 경칩, 춘분을 지나 청명 절기는 되어야 얼었던 강이 다 풀렸다. 변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강은 '변하'다. 조운을 비롯한 물류 수송을 위해 황하의 물을 인공적으로 끌어들인 거대한 토목 공사로 만든 강이다. 그런데 이 강이 골칫거리였다. 수량이 풍부해 선박 수송은 좋지만, 토사가 쌓이니 흙을 퍼내는 준설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이른 봄이면 황하에서 얼음 덩어리가 대량으로 쏟아져 들어와 제방이 무너지고 수해를 입기도 했다. 북송 정부는 변하 연안에 수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매년 초겨울 변하와 황하가 맞닿는 물목에 겨울 둑을 설치했다가 이듬해 청명절에 둑을 무너뜨리는 조치를 취했다.

둑이 무너지고 물이 들어오면 겨우내 적막하던 변하에 다양한 배들이 곡물과 승객을 싣고 나타났다. 변하는 하루 사이에 시끌벅적한 예전의 풍광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축제와도 같은 활기 속에서 배들이 줄지어 변하로 들어오는 '상하'를 구경했고, 이것이 해를 거듭하면서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바로 '상하'의 의미다.

'청명상하도'는 이후 명·청 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번 모사되었다. 이를 '후대본(後代本)'이라 부른다. 그때마다 성문의 모양이나 사람들의 차림새, 기와의 양식 등이 시대에 맞게 바뀌었다. 한번 길을 잘 닦아놓으니 그 위로 다양한 차들이 통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나라도 '청명상하도'를 본받아 그린 그림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의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다. 연결되는 그림을 담은 8폭 병풍인데 가로 길이가 4m로 '청명상하도'보다는 짧지만, 세로는 1m가 넘어 30㎝에 불과한 '청명상하도'보다 3배 이상 크다. 그만큼 더 다양한 장면과 군상을 담아놓았으며 등장인물은 2000명이 넘는다.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는 '청명상하도'와 '패문재경직도(佩文齋耕織圖)'를 반반 섞어놓은 듯한 구성에 조선시대의 문화와 일상을 첨가해 넣었다. 영·정조대를 지나면서 조선의 수도 한양은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것이 한양으로 집중되었다. 연행사들을 통해 국경을 넘어온 외국 문물도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그림에는 이러한 활기찬 경제 통상적 분위기를 긍정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다.

10년 전쯤 우리는 '태평성시도'의 장면들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뜯어보면서 해설해주는 책을 내기로 했다. 비록 중국 그림을 모방하긴 했지만, 그림 속에는 조선 후기의 도시생활이 잘 녹아들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돋보기를 들고 비둘기를 기르는 경화세족들의 고급 취미의 현장을 구경하는데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소장처인 국립중앙박물관의 허가를 얻어서 고화질로 장면 장면을 촬영한 다음 그걸 책 형태로 제본해두기도 했다. 그래야 그걸 보고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가 워낙 바쁘신 분이라 아직까지 원고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참에 넌지시 한번 연락을 드려봐야겠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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