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재명, ‘침대재판’ 후엔 ‘판사 겁박’인가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침대축구는 축구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팀이 골을 먼저 넣었을 때 시간을 질질 끄는 전술이다.
또한 이재명의 경우엔 그의 재판 지연 전술을 가리켜 '침대재판'이란 말도 쓰이고 있는 게 흥미롭다.
일이 그렇게 됐으면 앞으론 침대재판을 시도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꿔먹을 만하건만 민주당 의원들은 앞다투어 판사를 비난하면서 '법 왜곡 판검사 처벌법' '판사 선출제'까지 꺼내들었고, 강성 지지자들은 '판사 탄핵'을 외치고 나섰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시사저널=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침대축구는 축구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팀이 골을 먼저 넣었을 때 시간을 질질 끄는 전술이다. 연기 역할을 맡은 선수는 플레이가 격렬한 상대팀 선수에게 다가가 몸이 살짝만 스쳐도 얼굴을 부여잡으면서 나뒹군다. 운동장 밖에 있는 코치들에게 의료진의 투입을 요구하고, 5분 후에 오케이 사인을 그리며 슬그머니 일어난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쓰러진 후 감독에게 교체 사인을 낸다. 교체가 이뤄지면 일부러 다리를 질질 끌며 걸어 나가고 교체 투입된 선수는 그 선수를 격려하는 식으로 시간을 끈다. 이 같은 행동을 90분 동안 10번 이상 되풀이한다.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가 2021년 12월에 쓴 "윤석열의 '침대축구'"라는 제목의 '스포츠 콩트'에서 설명한 게 재미있어 압축해 소개한 것이다. 이 전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면 대결을 피하면서 버티기'인데, 이런 상황이 정치판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탓에 정치용어로 원용돼 쓰이기도 한다. 그 이전에도 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영노의 콩트 제목이 시사하듯이 대통령 윤석열의 대선후보 시절 그의 정치적 행태와 관련해 가끔 쓰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은 침대축구 혐의에서 자유로운가? 그렇진 않다. 빈도수가 비교적 적을 뿐, 이재명도 침대축구 비판을 받았다. 또한 이재명의 경우엔 그의 재판 지연 전술을 가리켜 '침대재판'이란 말도 쓰이고 있는 게 흥미롭다. 침대재판 이미지는 재판이 진행되지 않게끔 아예 드러누워 버리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온갖 다양하고 창의적인 수법이 동원된다.
최근 화제가 된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 이화영의 '쌍방울 불법 대북 송금' 재판엔 침대재판의 신기(神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화려한 수법들이 동원되었다. 이건 최종심까지 전 과정을 잘 기록해 두었다가 로스쿨의 교재로 쓸 만하다. 내가 법학자가 아니어서 그 교재를 쓸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수법들을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1심 선고까지 20개월이 걸렸을 정도로 기기묘묘한 수법들이 망라되었다는 것만 밝혀두자.
이화영은 징역 9년6개월을 선고받았으니 침대재판의 주도자들에겐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였다. 일이 그렇게 됐으면 앞으론 침대재판을 시도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바꿔먹을 만하건만 민주당 의원들은 앞다투어 판사를 비난하면서 '법 왜곡 판검사 처벌법' '판사 선출제'까지 꺼내들었고, 강성 지지자들은 '판사 탄핵'을 외치고 나섰다. 새삼 놀랄 일은 아니다. 판사 겁박은 민주당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조국의 부인 정경심이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고, 다음 날 법무부의 검찰총장 윤석열 정직 2개월 중징계에 대해 법원이 '집행 정지 결정'을 내리자, 민주당은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판사를 모욕하는 발언들을 쏟아냈다. 어느 의원은 판사 실명까지 거론하며 '좌표'를 찍었다. 이런 일련의 작태는 민주당에 불리한 판결이 나올 때마다 반복되었다. 그러다가도 민주당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면 판사와 사법부를 극찬하는 행태도 반복되곤 했으니, 그 정신상태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민주당이 아무리 내로남불의 화신이라지만 '3권 분립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면 모를까,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재판에 대해서만큼은 내로남불을 버려야 할 게 아닌가. 민주당에 유리한 판결엔 기뻐하고 불리한 판결엔 슬퍼하는 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를 넘어 극찬과 저주라는 양극화된 태도를 보이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