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느냐 죽느냐' 무너진 경계 햄릿의 고뇌는 더 깊어졌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 실존을 찾을 수 있다"는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의 말은 삶을 밀도 있게 살아가기 위해 자신도 언젠가 죽는다는 것, 유한한 시간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연극이 인물을 극적인 감정에 몰아넣기 위해 죽음에 직면하게 하는 것은 죽음이 인간을 각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인물들을 '죽은 채로 살아 있는 사령(死靈)' '살아 있는 비존재의 존재들'로 그린 연극 '햄릿'(연출 손진책)이 공연 중이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인물들이 유령처럼 늘어선 무대에 네 명의 유랑극단 배우가 등장한다. 극 중 인물 햄릿이 아버지의 원수 앞에서 선보일 극중극(등장인물에 의해 연극 안에서 이뤄지는 연극)에 출연할 인물들이다. 안개 덮인 무대에 "춥다" "먹물처럼 깊은 밤이다"라고 외치며 나타난 이들은 곧 "이제 산 자는 잠에 들고, 죽은 자가 눈을 뜨는 때"라며 본연극의 시작을 알린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를 찬탈한 숙부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원수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괴로워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목숨을 내던지지 못하고 갈등하는 인간의 나약한 내면을 묘사하는 작품이다.
공연제작사 신시컴퍼니가 선보이는 이번 '햄릿'은 등장인물들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 그린다. 암살과 자결, 우발적 살인 등 죽음으로 점철되고 죽음 앞에서 인물들이 실존적 갈등을 겪는 '햄릿'에서 아예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없애버린 것이다.
인물들은 공연 내내 검은 상복을 입고, 무대 뒤에 병풍처럼 세워진 흐릿한 거울들은 그들의 모습을 유령처럼 비춘다. 극 중 목숨을 잃는 폴로니어스와 레어티스, 거트루트 등은 원래 망령이었다는 듯 땅에서 일어나 무대 뒤로 걸어 나가기도 한다.
삶과 죽음을 두고 사투를 벌이는 인물들을 이미 죽어 있는 사령으로 묘사하는 '햄릿'의 연출은 감정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레어티스가 자결한 여동생 오필리어의 시체를 끌어안을 때, 비극의 원흉 클로디어스가 마침내 독배를 마시고 눈을 감을 때, 연극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를 햄릿이 읊조릴 때도 관객에게는 묽어진 감정만 전달된다. 이미 죽은 자에게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이 직면하는 죽음보다 절실히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어갔으면 좋겠다"는 손진책 연출가의 의도처럼 관객은 유령들의 가짜 삶과 가짜 죽음을 덤덤히 관조하게 된다.
'햄릿'은 햄릿이 고용한 네 명의 유랑극단 배우만 살아 있는 인물들로 그린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골적인 극중극을 선보이며 햄릿과 클로디어스의 갈등을 파국으로 이끄는 이들은 '햄릿'의 막을 열고 닫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이들은 '햄릿'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멀리서 종이 울리네" "이 기나긴 광대놀음도 이제 끝인가"라고 외치며 사령들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햄릿'은 연극에 대한 인물의 대사를 추가해 메타 연극(연극에 대해 다루는 연극)의 성격을 강화하기도 했다. 복수를 마치고 숨이 끊어지기 전 햄릿은 충직한 벗 호레이쇼에게 말한다. "이것은 나의 무대, 나의 연극, 나는 배우, 자네는 관객. 사라지는 건 내 몫이고 남는 것은 자네 몫이지… 비로소 나에게 침묵이 허락되었구나."
신시컴퍼니가 2016년, 2021년에 이어 세 번째로 선보이는 이번 '햄릿'에는 전무송·이호재·박정자·손숙 등 원로 배우들, 첫 연극 무대에 서는 루나(에프엑스), 주인공 햄릿 역을 맡은 강필석과 이승주 등 24명이 출연한다. 9월 1일까지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된다.
국립극단도 오는 7월 5~29일 연극 '햄릿'(각색 정진새·연출 부새롬)을 선보인다. 국립극단 '햄릿'은 성별과 선악의 경계를 허물었다. 햄릿, 호레이쇼 등 주요 인물의 성별을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꿨고,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는 여성에서 남성으로 각색했다. 클로디어스 등 악인들의 행동에는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해 선인과 악인의 경계를 모호하게 했다.
죽음으로 얼룩진 또 다른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연출 김미란) 역시 지난 13~16일 관객을 맞았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장군 맥베스가 마녀들로부터 자신이 왕이 될 거라는 예언을 들은 뒤 야욕에 빠져 파멸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국립극장의 이번 '맥베스'는 원작의 인물을 한국의 정육점 집안 사람들로 각색했다. 하얀 타일로 벽이 덮여 있고 무대 뒤에 짐승의 머리들이 자리한 그로테스크한 무대에서 인물들은 중간에 놓인 긴 철제 테이블을 중심으로 살육전을 벌인다.
국립극장 '맥베스'는 배우들의 시각적인 표현과 뮤지션들의 음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6명의 농인 배우가 수어와 몸짓으로 주요 인물들을 연기하고, 정육점 위생복을 입은 채 무대 좌우에 앉은 소리꾼 4명이 창(唱)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한국수어와 한국어라는 두 가지 언어를 관객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다. 무대 구석에 위치한 연주자들은 거문고와 베이스, 북, 기타 등으로 몽환적인 사운드를 만들어 수어와 창을 뒷받침한다.
공연 제작사 샘컴퍼니가 선보이는 연극 '맥베스'(연출 양정웅) 또한 다음달 13일부터 8월 18일까지 무대에 오른다. 양정웅 연출가는 지난 5월 제작발표회에서 "셰익스피어 비극의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정통에 가깝게, 또 현대적인 미장센과 함께 만들어볼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맥베스 역은 인기 영화 배우 황정민이, 맥베스의 야심을 부추기는 레이디 맥베스 역은 김소진이 맡았다. 마녀들에게 또 다른 예언을 듣고 맥베스의 정적이 되는 뱅코우는 송일국이 연기한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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