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물 풍선 오가는 재난적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이재킹> 또한 마찬가지다. 1971년 1월 23일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기에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선 반드시 과거의 실제 사건과 이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를 함께 살펴봐야만 한다.
물론 한 편의 영화가 지니는 독립성과 생명력을 충분히 고려하는 것 또한 필요한 자세이겠으나 실제 사건이 과거 반공교육의 주요 소재였음을 상기해본다면 남북 관계가 점차 경색되어가는 현 시점에 이 작품이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 총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필연적이다. 과거의 사건, 이를 재현한 현재의 영화, 그리고 지금의 남북 관계, 이 세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어쩌면 <하이재킹>에 담긴 진정한 의미들을 발견해내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이재킹>의 시작은 1969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공군 조종사였던 태인(하정우)은 북으로 향하는 항공기의 엔진을 격파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결국 비행기를 북으로 보내버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강제 전역 당하고 민항기 조종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강제 전역 당할 때 비행단 단장은 다음과 같이 질책한다. "니 알량한 휴머니즘 때문에 피 눈물 흘리게 된 사람이 몇 명인지 기억해라." 단장의 판단은 남한으로 귀국하지 못한 11명의 가족들(영화에선 이를 1000명으로 계산한다)이 결국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평생 삶을 제약받게 될 것이라는 예측으로부터 비롯한다. 그와 달리 태인의 판단은 미래를 고민하기보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펼쳐진 민간인의 희생을 최소화 하려던 것이었다.
영화는 태인의 판단을 옹호하며 그의 '알량한 휴머니즘' 덕분에 대한항공 F27기가 납북되지 않고 대부분의 승객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다고 그려낸다. 이러한 영화적 태도는 태인을 영웅의 위치로 승격시키고 한 사람의 희생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되돌아 보도록 만든다. 물론 실제 사건에서 몸을 던져 승객을 구하고 희생된 전명세 수습 조종사의 행동은 충분히 숭고한 선택이었고 영웅적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는 ‘영웅’에 대한 시선은 좀 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태인이 지닌 '알량한 휴머니즘'은 <하이재킹> 전체를 관통한다. 그리고 YS-11기를 격파하지 못했던 태인의 '알량한 휴머니즘'이 어떻게 F27기를 구원하는 '영웅적 휴머니즘'이 되었는지 주목한다. 알량한 휴머니즘은 태인의 사수이자 YS-11기의 부조종사였던 민수(최광일)와의 사적인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태인이 최초 보고를 받고 북으로 향하는 기체 옆으로 다가갔을 때 그의 시선에는 크게 두 개의 장면이 목도된다. 하나는 창밖으로 애타게 구조를 요청하는 절박한 승객들의 표정과 몸짓, 또 하나는 무전기로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는 태인에게 고개를 가로로 내젓던 민수의 표정.
전자가 별도의 해석이 필요없는 명징한 상징이라면 후자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일종의 알레고리다. 태인은 승객들이 보내는 선명한 의미 신호 보다 모호하게 다가오는 민수의 행동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최종 결정을 내린다. 태인의 결정에는 자신의 사수였으며 가족끼리도 친하게 왕래하는 민수와의 사적 관계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단장이 이러한 태인의 판단을 '알량하다'고 비판한 것은 절체절명의 중요한 순간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서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고 봤기 때문이다. 한 명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 1000명의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렸다는 단장의 질책은 그 자체로 논쟁적이긴 하나 무조건 틀렸다고 비판할 순 없다. 납치극을 일으킨 범인, 용대(여진구)의 범행 동기 또한 북한에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폭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알량한 휴머니즘에 대한 태인의 해명은 사건 발생 뒤 F27기 부기장으로서 규식(성동일)과 함께 비행할 때 드러난다. 규식은 YS-11기에 대한 태인의 판단을 "군인으로는 꽝이지만 여객기 조종사로서는 합격"이라고 평가한다. 군인의 입장에서 YS-11기에 사격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옳지 않다는 판단이다. 이 평가는 단장의 입장과 유사해 보인다. 단 규식은 그의 논리적 판단, "사람 살리는 본능"을 알아 보고 태인에게 합격 판정을 내린다.
태인은 민수가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 단순히 쏘지 말라는 신호를 넘어 "승객들 위험하게 만들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고백한다. 규식은 이러한 태인의 판단을 선험적인 본능으로 평가한다. 태인의 사람을 살리는 본능은 한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발휘됐다. 눈빛만 봐도, 몇 가지 제스처만 봐도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관계. 태인의 본능은 민수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하이재킹>은 사람을 살리는 태인의 영웅적 휴머니즘이 단지 태인 만의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 F27기가 분단선을 넘으려 하자 YS-11기 상황과 유사하게 공군 전투기가 여객기를 위협한다. 이 순간 감독은 태인의 얼굴과 민수의 얼굴을 교차 편집한다. 장르 영화로서 긴장감이 가장 극한에 달하는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감독은 의도적으로 태인과 민수의 심정을 동일시 한 것이다.
이 의도적인 몽타주는 한편으로 장르 영화의 공식을 배반한다. 장르 영화는 빠른 서사 진행의 속도감을 통해서 극적 긴장감을 쌓아 올려야 한다. 서사의 속도감은 사건의 연쇄로 발생하며 이 사이에 다른 이질적 요소를 개입할 시간적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독은 민수의 얼굴을 삽입하여 서사 진행을 잠시 정지시키고 태인과 민수의 상황이 다르지 않음을 상기한다. 그리고 극단적 선택의 기로 속에서 화면의 정면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을 통해서 그들이 지녔을 질문을 관객들에게도 던진다. "당신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하이재킹>은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었다. 합심해서 용대를 제압하자는 승객의 제안에 주저하는 다른 승객들의 난처한 얼굴 표정에서, 승객들의 치료를 위해 용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승무원의 당당한 태도에서, 북으로 넘어가면 억류될 위험이 큰 아들을 위해 증서를 입에 삼키는 어머니의 행동에서 이미 <하이재킹>은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질문은 사람을 살리는 영웅적 휴머니즘이 단지 태인의 것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드는 것은 단 한 명의 희생양 만으로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 조차도 지극히 관습적이고 당연한 질문으로 다가올테지만, 이 쯤에서 필자 또한 다시 한 번 질문하고 싶다. "진심으로,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공교롭게도 <하이재킹>은 남북 관계가 점차 경직되어가는 와중에 개봉한다. 따라서 분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영화적 재해석이란 평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실제 사건이 과거 반공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사건에 덧입혀진 이데올로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해내려는 의지로 읽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필자에게 <하이재킹>은 이데올로기 영화 이전 재난영화였다. 일반적으로 재난영화는 재난의 원인에 집중하기 보다는 재난이 벌어진 이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 하는 서민들의 몸부림에 집중한다. <하이재킹>은 이와 다르게 남한에서 빨갱이로 몰려 억압과 폭력을 겪어야 하는 용대의 서사 또한 집중하며 재난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남한 사회의 단면을 여과없이 노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재킹>은 재난영화이기 보다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대립하는 액션 장르 영화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영화라 주장하는 것은, <하이재킹>이 용대의 억울함의 근원을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재난 상황에 의한 결과로 그려내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형이 북한에 가서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는 소문 하나로 모든 기회를 철저히 빼앗겨야 했던 용대에게 남한은 더는 이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이상적 사회는 형이 있는 북한이다. 이러한 판단 하에 납치극을 벌인 용대의 선택은 분명 옳지 않다. 하지만 과연 남한 사회가 그의 범죄 행각에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장의 주장 처럼 북한에 납북된 YS-11기의 승객 가족들은 용대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의 계산대로 1천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용대와 같은 분노를 품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이재킹>은 이러한 비극의 악순환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폭력이 폭력으로 이행되는 사회적 현상을 중단시키려 시도한다. 만약 '빨갱이' 이데올로기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겪어야 했던 폭력의 트라우마로부터 비롯한 것이라면 국가보안법을 빌미로 남은 자들에게 복수를 행했던 폭력의 재생산 또한 한국전쟁의 자장하에 놓여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폭력이 또 다른 폭력으로 이행되는 상황은 그 자체로 재난적임에 틀림없다.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종료되었다고 해서 재난 또한 종료된 것이 아니다.
<하이재킹>은 한국전쟁이라는 하나의 재난이 종료된 이후의 1971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상흔이 여전히 지속되는 재난적 상황으로서 1971년을 바라본다. 빨갱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심장이 떨리고 피해당한 가족과 이웃이 떠오르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가 살아 숨쉬고 있는 시대! 그런 재난적 시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펼쳐 보이는 지옥도가 바로 <하이재킹>의 무대인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전히 분단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지금의 한국 또한 재난적 상황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그런 재난적 상황에 익숙해져서 재난이 아니라 판단하는 현 사회가 문제적이지 않을까? '당신이라면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이재킹>이 제기한 질문은 극 중 인물에게만 제시된 질문이 아니다. 극한의 풍경을 안락한 극장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관객에게 제시된 질문이다. 질문을 받았으니 답변의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
과연 당신은 오물 풍선이 휴전선을 넘나드는 현재의 재난적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과 판단을 할 것인가?
[이동윤 영화평론가(dongyunlee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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