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전증 수술하면 고통 더는데...병원은 전국 6곳뿐”

김명지 기자 2024. 6. 2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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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봉 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위원장
‘한⋅미⋅일 뇌전증 국제기자회견’
“지역 거점 센터 지정 관리해야”
“연간 10억~20억 예산이면 센터 구축 가능”
홍승봉 대한뇌전증센터학회 회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한국의 뇌전증 치료와 환자들의 관리를 향상시키기 위한 국제기자회견’에서 발표하고 있다. /김명지 기자

중증 뇌전증을 앓는 A씨는 수년 전 오른손 손가락 3개를 잃었다. 혼자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몇 시간 동안 끓는 물에 손을 넣은 채 방치된 것이다. A씨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의료진에게 “손가락으로 끝난 게 정말 다행”이라고 말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뇌전증 국제기자회견’에서 홍승봉 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위원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이 소개한 실제 중증 뇌전증 환자의 사연이다. 홍 위원장은 A씨의 사연을 공개하며 “이 같은 비극을 끊을 방법이 뇌전증 수술인데, 국내에는 수술할 병원이 점점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대한뇌전증센터학회가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해외 의사들을 초청해 국내 환자 관리 실태 문제를 환기하기 위해 열렸다.

뇌전증은 과거 간질로 불리던 발작성 뇌 신경 질환이다. 뇌 손상으로 뇌신경세포에 과도한 전류가 흘러 경련과 발작을 일으킨다. 전기 신호를 주고받는 뇌 신경세포에 합선이 생겨 스파크가 튀면서 마비와 발작으로 이어진다. 발작의 빈도와 세기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중증 난치성 환자들은 돌연사할 확률이 건강한 사람보다 30배 높고, 신체 손상율은 50~100배에 이른다.

홍 위원장는 “적지 않은 중증 뇌전증 환자들이 마취통증의학과 의사가 부족해 병원에서 수술을 받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다”며 “의사를 늘릴 수 없다면 마취과 진료지원(PA)간호사를 서둘러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뇌전증 환자는 신체적 고통만큼 정신적 고통도 상당하다. 수시로 발작을 일으키니 사회 생활이 쉽지 않아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 환자의 50%가 우울증, 40%는 불안증, 30%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다.

홍 위원장에 따르면 미국과 일본만 해도 뇌전증 환자 관리 시스템이 잘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뇌전증과 정신건강을 함께 관리하는 ‘포괄적 뇌전증 치료’가 보편화하고 있다. 대한뇌전증센터학회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 진료 시간은 일본 15~30분, 미국 30~60분이다. 하지만 한국은 환자 진료 시간이 2~5분 내외로 짧고, 전문 인력과 인프라도 부족하다.

상황은 이런데 국내에서 중증 뇌전증 환자를 진료할 병원과 의사는 계속 줄고 있다. 뇌전증 전문 의료진을 두고 수술도 하는 국내 병원은 6곳에 머문다. 그나마 4곳은 서울에 있다. 뇌전증 수술할 수 있는 의사도 전국에 7명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홍 위원장는 뇌전증 환자 관리를 개선하기 위해 ‘거점 뇌전증 지원병원’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뇌전증 거점 병원은 미국은 260곳, 일본은 28곳을 운영하고 있다. 일본은 또 전국 49개 현의 각 대학병원으로 환자들이 분산할 수 있다. 홍 위원장는 “일본을 모델로 삼아 국내 18개 국립대병원부터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홍 위원장는 거점 센터를 구축하는 데 연간 10억~20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보고 있다. 뇌전증지원코디네이터로 전문간호사나 사회복지사를 두는 인건비를 합한 것이다.

나카사토 노부카즈 일본 도호쿠 대학병원 뇌전증센터장은 이날 “도호쿠대 병원에서는 뇌전증환자 지원코디네이터들을 두고 있으며 시스템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동진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교수(대한뇌전증학회 회장)는 “뇌전증 거점 병원 체계가 자리를 잡으면, 이를 기반으로 뇌전증 이외의 신경과 질환과 각종 만성질환 환자를 관리하는 전국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2032년까지 뇌전증 국가적 지원체계를 갖추자”며 “뇌전증 문제 해결되면 다른 신경과 질환도 해결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나카사토 교수는 “일본은 의사 수를 점진적으로 늘렸지만, 의사들의 대도시 근무 선호로 인해 지역 의료 격차 문제가 여전히 심각하다”며 “지역의 의료 격차를 줄이기 위해 비대면진료와 원격의료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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