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판타지로 써 내린 현실 비판…정보라 신작 '작은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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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이 어느 날언니 '상'에게 기계가 되겠다고 말한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이른바 '트랜지션'은 통신장치나 카메라 혹은 다른 감각 증폭기를 신체에 부착하거나 연결하는 수준부터 아예 몸을 전부 기계로 바꾸는 수준까지 모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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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용래 기자 =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이 어느 날언니 '상'에게 기계가 되겠다고 말한다. 첨단 기술을 이용해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육체 전체를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이른바 '트랜스휴먼'이 되겠다는 거다.
동생이 로봇이 되려 하는 이유는 돈을 더 잘 벌고 애를 잘 키우기 위해서다.
로봇이 되면 잠을 덜 자도 되니까 애도 더 잘 볼 수 있고, 손목이나 허리가 아프면 교체하면 되니까 아이도 더 많이 안아줄 수 있다. 또 지치지 않기에 더 많이 놀아주고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다. 그뿐인가. 병에 걸릴 걱정도 덜 하고 다쳐도 더 빨리 고칠 수 있다. 회로가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으니 갖가지 필요한 정보도 핸드폰 들여다보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알 수 있다. 한마디로 "혼자서 애 키우는 데는 이게 최고"다. 그런데 언니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반대하는 걸까.
정보라 작가의 신작 단편집 '작은 종말'의 표제작 이야기다.
배경은 억만장자들이 소유한 과학기술 기업들이 일제히 트랜스휴먼의 시대를 맞이하라고 강요하는 근미래다. 인간이 로봇이 되는 이른바 '트랜지션'은 통신장치나 카메라 혹은 다른 감각 증폭기를 신체에 부착하거나 연결하는 수준부터 아예 몸을 전부 기계로 바꾸는 수준까지 모두 가능하다. TV 광고에서는 성우의 목소리로 "최소한의 침습적 시술로 당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습니다"라며 유혹한다.
혼자서 정자 기증으로 애를 낳고서 플랫폼 노동을 전전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동생은 로봇이 되겠다고 선언한 뒤 갑자기 연락이 끊기고, 언니인 '상'은 동생을 찾아 나섰다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려 낯선 존재들과 맞닥뜨린다. 이들은 내 동생과 조카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정보라 특유의 기발한 설정과 뒤를 궁금하게 하는 긴박감 넘치는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첨단을 달리는 극단적 자본주의의 횡포 아래서 지켜야 할 인간성이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이제 상은 자신에게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음을 이해했다. 자신과 아기가 인간으로서 살고, 인간으로서 늙고 병들어, 외롭고 고유하고 존엄한 존재인 인간으로 끝까지 남아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삶이고 어떤 죽음이 될지 지금으로서는 아직 알 수 없더라도."('작은 종말'에서)
신작 소설집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2020년부터 지난해 겨울까지 발표한 정보라의 최신 단편 총 열 편이 담겼다.
책 전반에는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플랫폼 노동자 등 시대와의 불화 속에 아등바등 살아가는 약한 존재들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함께 데모하는 동지를 상실한 이후 그를 회고하는 무성애자('지향'), 전국에 딱 세 개 남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사서('도서관 물귀신'), 군사 정권에 엄마를 잃고 10주기 추모 행진을 준비하는 딸('행진')이 바로 그들이다.
SF와 판타지의 장르적 쾌감 뒤로 약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과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려는 강한 투지가 읽힌다.
수록작 '행진' 속 화자의 말에 그런 작가의 태도가 잘 녹아있다.
"모든 사람이 다 투사가 될 수는 없어"라고 말하는 언니를 두고 이 작품의 화자는 "그러나 누군가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니까 나도 싸울 것이다"라고 결연히 말한다. 작가가 자신에게 하는 다짐처럼 읽힌다.
퍼플레인. 372쪽.
yongla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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