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클했던 북-러 정상회담 촬영 후일담[청계천 옆 사진관]
● 레드 카펫 위로 등장하는 푸틴의 모습
평양 김일성 광장에 임시로 설치된 구조물 앞에 레드 카펫이 깔려 있다. 광장과 건물 위아래에는 유치원생을 포함한 수만 명의 평양 인민들과 군인들이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인민들은 김정은 위원장과 고위 참모들이 붉은 커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다. 쇼가 시작될 모양이다.
화면 왼쪽에서 카메라를 멘 두 사람이 허겁지겁 뛰어온다. 김정은 위원장의 사진을 찍고 있던 북한 ‘1호 기자’들이 카메라를 멘 두 사람에게 자리를 잡으라고 도와준다. 북한 최고 지도자를 찍는 사진기자들이 러시아 푸틴을 수행하는 사진기자들을 돕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진기자들은 최고지도자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헐레벌떡 뛰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모습은 곧 최고지도자도 현장에 들어온다는 의미이다.
기마대가 도열해 있고 그 앞으로 군 의장대가 도열해 만든 통로로 푸틴이 탄 차가 들어와 멈춘다. 푸틴과 김정은이 악수를 하고 그 장면을 양국 사진기자들이 찍기 시작한다.
●전날 밤 촬영 현장
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의 만남은 전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다. 서울의 한낮 온도가 36도에 육박한 폭염의 날씨였지만 평양에는 큰 규모의 군중 행사가 열렸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대한 공식 환영식을 유튜브를 통해 몇 번 돌려 보았다.
정치 행사라고 하기에는 그 스케일이 너무나 커서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 주인공 푸틴을 위해 평양에 세트장을 엄청나게 크게 만들고 시나리오를 짜고 인원을 동원해 놓았다.
그러나 전날 밤 남주(男主)는 촬영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감독 입장에서는 속상하고 기다리던 스태프와 엑스트라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몸값 비싼 주인공에게 뭐라 속시원하게 퍼부을 수도 없다. 남주 스케줄에 맞춰 나머지 사람들이 움직이며 촬영을 마칠 수밖에 없다.
당초 18일 저녁에 평양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상보다 훨씬 늦은 19일 오전 2시가 넘어야 평양에 도착한 푸틴은 1박 2일이 아닌 당일치기 순방을 했다. 국제 외교 무대에서 지각 대장인 푸틴이 이번에도 늦을 것이라는 것을 북한이 예상했던 것일까? 북한은 푸틴의 짧은 체류 시간 동안 최대한의 촬영분량을 뽑아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탑 클래스의 배우를 섭외한 감독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다.
첫 번째, 19일 새벽 다른 스탭과 참모들은 다 귀가시켰지만 촬영팀은 공항에서 김위원장과 함께 푸틴을 기다렸다. 외신을 통해 들어온 사진을 보면 푸틴을 기다리고 있는 김 위원장과 현송월 부부장 이외에 촬영용 사다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복수의 사진기자들이 보인다.
고프로는 북한 ‘1호 사진기자’의 카메라에도 설치되었다. 보통의 경우 사진기자들은 스틸 사진만을 찍는다. 1초를 1/250초로 나눠 찰각찰각 찍는 방식이다. 연속 화면은 ENG방송용 카메라 기자들이 별도로 준비한다. 그런데 이번 환영식에서 북한 1호 사진기자들은 자신들의 렌즈 위에 고프로를 고정시켜서 스틸 사진과 동영상도 동시에 촬영했다. 역시 짧은 촬영 시간에 최대치의 분량을 뽑아내기 위한 총감독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보인다.
●촬영 현장의 숨은 공로자들
전날 스케줄이 꼬여 노심초사했을 평양의 행사 담당과 선전선동 담당자들은 충분한 분량의 촬영을 했을까 궁금하다.
전세계에서 이런 화면 구성이 가능한 나라는 이제 없다. 폭염 속에 한복을 입고 꽃술을 들고 있는 어른들, 캐주얼한 복장의 대학생들, 반바지와 반 팔의 어린이들은 화면을 빛나게 하는 조연들이다. 그들의 대사는 ‘조러친선, 푸틴 환영’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주인공을 위해 그리고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감독에 의해 저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스펙터클한 화면이 생산될 수 있는 사회라는 게 여전히 낯설다. 애국심으로 출연료를 대체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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