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T 과학 영재들도 의대로 떠난다…이공계 일자리 살려야"
이공계 인재 박사 2명 중 1명이 취업난…다양한 진로 방향 필요
'공대생=의대 진학 실패' 아닌데…과학기술인 사회적 인식 높여야
[서울=뉴시스]윤현성 기자 = #"1991년 우리나라 여학생 중 전체 수석을 하고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이후 2005년에는 지도학생이 '그렇게 공부를 잘하셨는데 왜 의대가 아닌 공대를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15년 새 공대 위상이 그만큼 추락한 것입니다."
#"내 학과에 만족하고 있는데 공대생이 무슨 의대 갈 성적이 안 돼서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학생들처럼 매도되는 분위기가 싫습니다."
갈수록 심화되는 이공계 기피 현상을 두고 국내 공학계 석학, 우리나라 최고 인재 중 한 명인 서울대 공대 재학생이 털어놓은 고충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본격화된 우수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최근 학령인구 감소, 의대 쏠림 현상 가속 등으로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손지원 과학기술연구원(KIST) 연구지원본부장은 21일 국회에서 진행된 '이공계 지원 특별법 개정 토론회'에서 이공계가 겪고 있는 위기와 활성화 방안에 대해 발표했다.
손 본부장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이공계는 1990년대 말 IMF 위기 이후 사회문화가 완전히 격변하면서 '이공계 연구원은 평생직장이 못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 실제로 1990년까지는 전국 자연계 대학 최상위 학과를 서울대 물리학과가 차지했지만 2000년대부터는 탑5 학과를 모두 의대가 차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손 본부장은 "의대 쏠림 현상이 많이 언급되고 있는데, 의대는 고소득·직업 안정성이 모두 있고 '최고'라는 자존심과 자부심까지도 채워질 수 있다"며 "소득 만이 아니라 이런 정신적 고양은 최고 인재를 끌어오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과학기술원의 이공계 인재들은 본인이 원해서 과학기술계로 왔음에도 사회적 인식 저하, 미래의 불안정성 등으로 의대로 이탈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고의 이공계 인재 육성 기관인 4대 과학기술원(KAIST·UNIST·DGIST·GIST)에서도 학생들의 의대 유출이 지속되고 있다. 이공계 영재들이 모이는 KAIST에서도 1학년 새내기들의 휴학 후 의대 진학이 17개 학부에서 매년 발생하고 있다. 4대 과기원에서는 최근 5년 간 1006명이 자퇴·미등록·유급 등으로 중도 이탈했는데, 학계에서는 적지 않은 수가 의대로 진학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손 본부장은 이처럼 우수 인재들의 이공계 대학원 진학이 줄어들면서 우리나라는 인재 유치, 특히 해외 인재 유입 등에 대한 공백이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도 12대 전략기술 R&D 집중 투자에 따라 전문 인력 수요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인재 수급 방안이 불확실해 향후 국가경쟁력 퇴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한 필수 산업인 반도체 인력의 경우 향후 5~10년 내 약 3만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공계 우수 인재 부족 현상이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 미국-중국의 인재전쟁이 본격화되며 우수 인력 유입을 위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그 과정에서 특히 AI 등 분야 인재의 탈(脫) 한국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10년 간 해외로 유출된 이공계 고급 두뇌 규모는 매년 3만~4만명으로 약 30만명 이상이 해외로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이같은 인재 유출 현상과 무관하게 전체 학령인구 감소도 이공계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2050년에는 이공계 대학(원)생 규모가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 2019~2023년 과학기술 분야 학사 이상 신규 인력 수급은 약 800명이 부족했는데, 2024~2028년에는 미달 규모가 4만7100명에 달할 전망이다.
손 본부장은 이공계 기피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는 ▲이공계 인재에게 다양한 성장경로 제시 ▲보다 많은 양질의 일자리 제공 ▲연구직 직업 매력도 제고 ▲과학기술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실 이공계에서 박사학위를 딴 인재들은 거의 대부분이 교수가 되길 원한다. 우리나라에서 교수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높은 만큼 이공계에서 사회적 존중을 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박사후 연구자들의 진로를 보면 미국은 54.6%가 산업계로 진출하지만 한국은 박사 졸업 후 2년이 지난 뒤에도 대학에 남아있다. 박사후연구생들이 취업 예비생으로 잔류하는 셈"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손 본부장은 이공계 인재들이 나아갈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보다 늘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1990년대에는 이공계 박사급 인재 대비 일자리 비중이 약 2.6배에 달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 비중이 0.5배 수준으로 박사 2명 중 1명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손 본부장은 "저는 공학인으로서 자부를 갖고 제 직업에 만족하고 있지만, 후학들이 계속해서 열패감을 느끼는 상황들이 국가경쟁력 저하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며 "이공계 위기 타파를 위해서는 현실성 있는 정책·제도와 함께 충분한 사회적 인식 제고도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hsyhs@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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