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방북 싸질러놓고 韓 겁박하는 푸틴, 더이상 우리를 시험 말라[핫이슈]
북한 방문을 마치고 베트남에 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 현지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한다면 매우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전날 러시아와 북한이 맺은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협정’을 통해 상대방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 군사원조 제공은 물론, 군사기술 협력 가능성이 높아진데 대해 우리 측이 정당방위 수준의 대응을 하자 또 한번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장호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이날 북·러 협정 전문이 공개되자 “우크라이나에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푸틴은 북한에 대한 첨단 군사기술 협력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북한의 포탄 제공에 따른 반대급부 가운데 우리가 가장 우려한 일이었다. 그것을 서슴없이 말하면서 우리에게는 침묵만 강요한다면 그게 온당한 일인가. 북한의 막무가내 행동에 날개를 달아줄 군사기술 지원이 대한민국 안보에 치명타를 조금이라도 초래할 수 있다면 사전에 막는 것이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해야 할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입장을 그나마 두둔할 수 있는 부분이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확장에 따른 러시아 안보 불안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자위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나라를 침공까지 할 일은 아니지만 이렇듯 정부는 작은 안보 구멍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 점에서 푸틴은 모순적이다. 나토와의 전쟁을 상정해 우크라이나를 침략까지 하면서도 우리가 당면한 위협을 제거하려는 노력에 대해 또다른 협박으로 대응하는 게 과연 상식적인가.
푸틴은 먼저 북한에 이런저런 무기와 기술은 절대 제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방북이 한반도 안정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이는 게 먼저다. 그래야 우리도 러시아를 믿고 당신들이 싫어하는 우크라이나에 무기 제공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러시아가 과거 북핵 문제를 다루는 한반도 6자회담 당사자로 참여해온 점을 감안하면 푸틴은 본인 방북이 그동안 러시아가 해온 노력을 우습게 만드는 작태임을 알아야 한다.
2주일 전 푸틴은 해외 통신사들과의 간담회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직접 무기를 제공하지 않은데 대해 감사와 함께 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다. 그 전에도 푸틴은 한국과의 관계 회복에 노력할 준비가 돼있다며 긍정적 시그널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 방북은 그 자체가 비우호적 행태인데다 거기에서 나온 결과는 도저히 한·러 관계 회복을 바라고서는 할 수 없는 최악의 내용이다. 1961년 ‘조·소 우호 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 상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에 버금가는 협약을 체결하고, 군사기술 제공 약속까지 해놓고 우리와 가까와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푸틴의 망상이자 과욕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 간 갈등의 골만 깊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푸틴의 적대적인 모습에 우리 국민은 러시아에 대한 불신을 한층 더 키울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러시아의 무도한 실상을 목격한 우리 국민은 이번 일로 러시아에 대한 혐오 이미지를 더 키우게 됐다. 그나마 남아있던 국내 친러파도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국민 마음이 떠난 나라를 상대로 정부가 우호적인 외교를 펼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푸틴은 북한 인민의 환대는 받았지만 방북으로 인해 우리 국민과는 높은 담을 쌓았다. 러시아인들에게 물어보라. 남·북한 중 어디에 가서 공부하고, 일하고 하고 싶은지. 정상적인 나라 지도자라면 방문 자체를 부끄러워 할 북한을 푸틴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찾아갔다. 그 기괴한 모습에 언론 조명은 받았지만 이를 놓고 박수칠 사람은 전세계에 아무도 없다. 러시아인들 중에도 제대로된 사람이라면 자기네 지도자가 인민을 헐벗게 하고 세습 왕조를 구축한 북한에 간 것을 창피해할 것이다.
오랫동안 푸틴을 지켜봐온 사람으로서 푸틴은 세상 변화에 맞추지 못하고 있다. 지금 같은 디지털 기술 시대에 남과 물리적 전쟁을 하고, 누구와 작당해서 특정 국가를 곤란하게 만들지를 고민하고 있을 게 아니다. 러시아에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기술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더 부끄러워 할 일이다. 미국 투자자이자 국제문제 평론가인 루치르 샤르마는 2012년 출간한 ‘브레이크아웃 네이션(Breakout Nations)’이라는 책에서 푸틴을 이미 이렇게 평가했다. “푸틴이 이 나라 경제발전을 다음 단계로 이끌 비전을 가진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최고지도자가 국가발전에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데도 계속 집권하는 것은 위험하다. 장기 집권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 성향을 발휘하고, 기득권층을 보호하는 것으로 정책의 초점을 바꾸기 때문이다”.
푸틴이 한 때 미국 독단에 맞서 제3세계 나라들에 희망을 주고, 국제질서 다극화를 이끄는데 주연이 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방북을 보면서 착각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푸틴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더 이상 겁박을 삼가하기 바란다. 본인이 일으킨 전쟁이 한·러 관계 파탄의 단초가 됐고, 북한과 밀월이 이를 악화시켰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 그게 안된다면 러시아와의 관계는 영영 개선될 수 없다. 그게 진정 러시아 발전을 위해 푸틴이 바라는 것인가.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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