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에서 푸틴으로…김정은의 ‘환승외교’ 도박 성공할까 [박수찬의 軍]
환승연애. 버스 바꿔타듯 기존 연애에서 새 연애로 갈아탄다는 의미로 양다리와는 달리 기존 연애를 정리한다는 뜻이 강하다.
이때 서로의 반응과 타이밍에 따라 마음이 엉키거나 풀리고, 감정이 행동이나 말로 표출되기도 한다. 이전 연애의 종료 시점과 새 연애의 시작점이 맞물리기도 한다.
이같은 모습이 최근 한반도에서도 등장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김 위원장은 몇 년 전만 해도 판문점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브로맨스’를 과시했지만, 이젠 휴전선 일대에 지뢰를 묻고 방벽을 쌓으며 한국을 배척하고 있다.
대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간 밀착을 강화하고 있다. 환승연애를 방불케 하는 ‘환승외교’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셈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나비효과 누리는 北
김 위원장은 2017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 직후 한·미와 대화 국면을 이끌어갔다. 문 대통령과는 판문점·평양 정상회담으로 남북 관계 해빙을 알렸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도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같은 국면은 오래가지 못했다. 2019년 2월 ‘하노이 노딜’에 직면한 김 위원장은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돌파구를 모색했다.
러시아와 북한은 서방과의 정치·경제 교류가 사실상 단절됐고, 서방에 대한 적대감도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국은 경제·기술발전을 위해 서방과 교류를 지속해야 한다. 중국이 자체 개발한 C919 여객기의 경우 엔진과 항공전자기계 등 핵심 장비를 서방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 경제는 러시아나 북한처럼 서방과의 교류를 단절할 수 없는 실정이다.
중국의 사정을 감안하면 러시아는 북한을, 북한은 러시아를 주목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포탄과 미사일 수요가 폭증한 러시아에 북한은 막대한 규모의 무기고를 개방했다.
북한은 포탄과 다연장로켓탄, 구형 전차 부품, 탄도미사일 등을 보내면서 러시아의 병참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외교적으로도 러시아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는 지난 19일 푸틴 대통령의 방북으로 보답을 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방북에서 김 위원장에게 러시아산 아우루스 리무진을 선물했는데, 이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위반이다. 대북 제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드러낸 셈이다.
“일방적인 조치를 반대한다”는 조약문까지 더하면 북한은 러시아가 향후 대북 제재에 동참할 여지를 차단하는 성과까지 얻은 셈이다.
김 위원장은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이라는 법적 근거를 통해 군사과학기술 분야 등에서 전방위적인 협력을 제도화할 토대를 마련했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 직후 공동 언론발표에서 “러시아는 조약과 연계해 북한과의 군사기술 협력 진전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북한이 원하는 것을 짚어준 셈이다.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지원을 제도적 장치로 만든 것도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에게서 얻은 성과다.
조선중앙통신이 20일 공개한 ‘포괄적인 전략적동반자관계에 관한 조약’ 제4조는 “쌍방 중 어느 일방이 개별적인 국가 또는 여러 국가들로부터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 타방은 유엔헌장 제51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러시아연방의 법에 준하여 지체없이 자기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로써 북한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맞설 외교·군사 분야 법적 장치를 확보했다. 이는 북한에 새로운 외교·군사적 동력을 제공한다.
하지만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활용, 러시아와 손잡고 미국이 내세우는 ‘동맹의 힘’에 맞설 기반을 마련했다. 태도가 바뀌긴 했지만, 미국이 원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결과다.
북한은 자신의 최대 약점인 군사적 지원국 부재를 해소하고, 유사시 러시아 군사원조를 확보할 길을 열어 최악의 경우에도 김정은 체제를 지킬 수 있게 됐다.
다만 러시아와 북한 간 해석·입장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북·러 정상회담 직후 공동 언론발표에선 양측의 기대나 해석에서 미묘한 차이가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동맹’이란 표현을 썼지만, 푸틴 대통령은 쓰지 않았다.
북한은 1961년 우호조약 시절처럼 러시아를 외교·군사적으로 강하게 묶어놓고자 ‘동맹’ 개념을 드러내려 했을 것이고, 러시아는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히면서 리스크 회피를 통해 전략적 자율성을 극대화하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도 이를 의식하는 모양새다. 김 위원장은 “임의로운 다사다변과 국난을 일치된 공동의 노력으로 답하기 위한 의무이행에 충실함에 있어서 그 어떤 사소한 해석상 차이도 추호의 주저와 흔들림도 없을 것이란 우리 정부의 불변한 의지를 엄숙히 선언한다”고 밝혔다.
해석상의 차이가 발생할 가능성과 그 영향을 김 위원장이 의식한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북한이 회담 하루만인 2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조약문을 공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용해 북·러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수준으로 높이고, 유사시 러시아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열었다.
그동안 한국군 내에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가정한 훈련이나 토의 등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영변 핵시설 관리 문제나 한·미 연합군이 북한 북부 지역까지 진격했을 때 중국의 움직임을 고려한 논의는 있었으나, 러시아 군사개입 여부는 군 안팎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진 않았다.
러시아가 군사개입을 하면 북·러 국경인 두만강 하류와 함경북도 북부를 활용할 전망이다. 6.25 전쟁 당시 소련은 두만강 철교와 선박을 통해 군수품을 보냈다. 이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쓸 북한산 탄약과 미사일을 자국으로 수송하는 통로다.
하지만 러시아가 조약대로 행동할 것인지는 두고봐야 한다는 관측도 많다. 조약을 맺고 비준하면 정치적 책임은 커지지만, 실제 이행 여부는 러시아의 전략적 판단 영역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의 정세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쟁을 치르는 러시아에 군수물자를 공급함으로써 북한은 러시아를 움직일 모멘텀을 키웠고, 준동맹 수준의 조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군 소식통은 “한쪽 또는 서로의 필요로 계약서를 써도 처음부터 지킬 마음이 없으면 계약은 안지켜진다. 계약서 쓰고도 상황 바뀌면 나몰라라 하지 않나. 국제 관계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아르메니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아르메니아는 1997년 러시아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 의무가 있는 곳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아르메니아의 안전보장 요구에도 소극적이었다.
결국 2020년과 2023년 아제르바이잔과 전쟁을 치른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을 포기했다. 러시아가 북한에도 이와 유사한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군사과학기술 교류도 마찬가지다. 북한이 원하는 것과 러시아가 응하려는 부분은 다르다.
우주발사체는 최근 군사정찰위성 발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큰 폭의 지원이 이뤄질 전망이다.
반면 핵추진잠수함을 비롯한 첨단 군사기술 이전 가능성은 작다는 평가다. 과거부터 러시아는 북한에 첨단 무기 공급을 꺼려왔다.
재래식 무기 등의 협력 가능성은 충분하다. 해당 분야에서 러시아가 북한에 제시할 수 있는 옵션은 수백 개다. 그 중 일부만 북한이 얻어도 한반도 군사 정세는 요동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쓰인 북한산 포탄과 탄도미사일은 성능에서 상당한 문제를 드러냈다. 이를 두고 북한의 군수품 품질 인증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 바 있다.
러시아가 북한 공업 분야의 품질인증과 시험체계 구축을 지원하면, 북한군 무기의 품질도 높아지고, 러시아가 공급받을 북한산 탄약과 부품의 신뢰성 향상도 가능해진다. 러시아도 북한도 이익이 되는 분야다.
전차나 자주포 성능개량, 군함과 잠수함 건조 지원, 신형 공대공·공대함·공대지 유도무기 개발 지원 등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러시아가 잠수함 건조를 도우면, 김군옥영웅함처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탑재 잠수함의 대량 건조 또는 성능 향상이 쉽다. 유도무기 개발 지원은 북한 공군의 노후 전투기 성능을 효율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어 비용 대비 효과가 크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 체결은 북·러, 한·미·일의 ‘글로벌 정치적 단층’이 더욱 깊어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김 위원장은 한·미 대신 러시아로 ‘환승’하면서 체제 유지 기반을 강화할 태세다.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러시아에 올인하는 그의 도박은 성공할까.
모든 것은 김 위원장과 북한 정권의 외교력에 달렸다. 분명한 것은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 점이다. 김 위원장의 행보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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