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 역주행’ 보수정당, 검찰국가 파트너로 전락
08 _ 왜소해진 정당 정치
불행하게도 국민의힘 계열 정당들은 개혁 보수가 아니라 수구, 레트로 보수의 길로 역주행했다. 보수정당이 정주행했다면 시대를 끌어가는 주도 정당의 위상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 민주, 복지 등 시대가 요구하는 어젠더를 ‘버린’ 탓에 당은 왜소화됐다. 이쯤 되면 선거 때 외부의 셀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양극화, 팬덤정치를 우리 시대의 병폐로 지목했다. 그 원인도 두루 짚었다. 그 기저요인(underlying factor)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보수·진보 정당의 정치적 왜소화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정당은 그 변화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 즉 전략적 응변(strategic maneuver)에 따라 선거 승패와 당세가 결정된다.(마크 브루어) 민주주의의 질, 사회의 수준도 달라진다. 현재의 국민의힘 계열 정당과 민주당 계열의 정당은 그 지향하는 가치, 지지기반 등에서 외연을 넓히기보다는 계속 안으로 옴츠리고 쪼그라드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근시안적 사고, 얕은 정치적 셈법과 내부 권력게임 때문이었다.
1990년에 있었던 3당 합당은 흔히 야합이라고 표현된다.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던 통일민주당, 신공화당이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결성한 것은 2년 전 총선에서 표출된 민심, 즉 여소야대의 4당 체제를 인위적으로 뒤집는 것이기에 비판받아 충분하다. 이 합당으로 217석의 초거대여당이 만들어졌지만 1992년 총선에서 149석으로 폭망했다. 3당 합당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됐다.
3당 합당이 비록 싸늘한 평가를 받았지만 보수정당의 입장에서 보면 이념적 확장과 지지기반 확충을 위한 좋은 기회였다. 3당 합당 이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제안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남북대화 노력을 통해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1992년 비핵화공동선언과 한반도에서의 전술핵 철수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평화’는 이처럼 보수정당 내에 하나의 뿌리로 자리잡았다.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에 합류한 통일민주당은 그 당의 리더인 김영삼(YS)으로 상징되듯 민주화운동의 양대 축 중 하나였다. 김영삼은 집권 후 지방자치 전면 실시, 공직자 재산공개, 군 사조직(하나회) 척결 등 민주주의를 한 발 더 진전시켰다. ‘민주’도 보수정당의 가치로 내화된 셈이었다.
2012년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의 대선후보였던 박근혜는 현직 대통령(MB)에 대한 광범위한 거부 정서와 2008년 금융위기로 초래된 경제악화 등을 고려해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무상급식 이슈가 쟁점이 됐고, 야당인 박원순 후보가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천안함 폭침을 부각하는 여당의 안보 프레임에 맞서 야당이 제기한 무상급식의 복지 프레임이 승리했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박근혜 후보가 이전의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과 질서는 세우자) 노선에서 복지로 전환한 것은 시대변화에 따른 응변이었다. 그는 보편적 기초연금과 무상보육 공약으로 당선됐다.
시대흐름 때문이든,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나 선거승리를 위한 일시적 변신이든 보수정당은 평화·민주·복지 어젠더를 수용했다. 물론 이 세 어젠더가 동시에 구현된 것이 아니었고, 세부적으로 보면 각각의 어젠더 모두 부족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박정희-전두환 정부의 휑한 반공 보수 시대에 견줘보면 놀라운 전환이었다. 그러나 보수정당은 자기부정하듯 하나씩 하나씩 이들을 벗어던졌다.
1998년 처음으로 야당이 된 보수정당은 정치적 이득을 위해 김대중 정부의 평화정책(햇볕정책)을 시종일관 물고늘어졌다. 2008년 재집권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초부터 여론의 뭇매를 맞자 대북 강경정책을 통해 보수층의 결집을 시도했다. 2008년 북한군에 의한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과 그로 인한 금강산관광 중단, 2010년의 북한에 의한 천안함 폭침을 계기로 남북 간 교역의 전면 중단(5·24 조치)을 단행했다. 이로써 평화는 버려졌다.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였던 서독의 보수정당(기민련)도 야당 시절 브란트 정부가 추진한 평화정책(동방정책)에 격렬하게 반대했으나 권력을 되찾았을 때는 이 정책을 계승했다. 기민련의 콜 정부가 이룬 통일도 이 계승이 불러온 기적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주의에서도 후퇴했다. 문화방송(MBC) 피디수첩 수사 등 언론을 탄압했고, 국정원·기무사·검찰을 동원해 야당과 시민사회를 짓눌렀다. 압도적인 대선승리와 뒤이은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획득했음에도 집권 초기 광우병 촛불시위에 직면하고, 4대강 사업으로 민심 이반을 초래한 뒤 권위적 통치로 대응한 탓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취임 초부터 국정원 댓글 사건과 세월호 참사 등으로 인해 초래된 위기를 권위적 통치, 개성공단 폐쇄와 같은 대북봉쇄정책으로 대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을 제어하기 위해 원내대표를 쫓아내는 한편 공천에도 개입해 진박 감별 논란까지 불사했다. 그 결과 당정분리라는 민주화의 성과가 무력화됐다. 결국 대통령이 탄핵당할 정도로 민주주의를 퇴행시켰다. 윤석열 정부도 다르지 않았다. 이준석 당 대표를 쫓아냈고, 대통령이 당 총재인 양 행세했다. 검찰을 여당으로 삼았고, 본인은 무오류의 스트롱맨으로 군림했다.
복지도 사회권의 보장, 사회적 안전망의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약자에 대한 시혜 차원으로 전락했다. 윤석열 정부가 약자복지라는 이름으로 추진하는 복지 축소가 대표적이다. 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벌 대기업이 주도하는 수출지향적인 고품질 제조업 중심의 성장 방식은 세금과 사회지출로 대표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해야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체제”이기 때문에 복지 확대를 포기했다는 것이 윤홍식의 분석이다.
불행하게도 국민의힘 계열 정당들은 개혁 보수가 아니라 수구, 레트로 보수의 길로 역주행했다. 보수정당이 정주행했다면 오늘날처럼 허약하고, 늘 패배할 두려움에 초조해 하지 않고, 시대를 끌어가는 주도 정당(leading party)의 위상도 잃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 민주, 복지 등 시대가 요구하는 어젠더를 ‘버린’ 탓에 당은 왜소화됐다. 이쯤 되면 선거 때 외부의 셀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2022년 대선에서 자당 출신의 전직 대통령 두 명을 구속한 검사 윤석열에게 명운을 맡기는 굴욕을 선택한 것도 이런 맥락 하에서 가능했다. 이제 보수정당은 검찰국가의 하위 파트너에 불과하다.
박근혜 탄핵 이후 보수는 ‘정치’를 통해 집권을 도모하지 않는다. 정치를 통해 성과를 내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을 길러내고, 그가 정치역정을 통해 벼린 비전을 중심으로 집권하는 정석을 추구하지 않는다. 때문에 정당을 강화하기보다 외부의 물리적 힘으로 일거에 판을 정리하는 방식을 꿈꾼다. 박정희-전두환의 쿠데타 경험에서 유전된 사고패턴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교실의 독재자 엄석대와 그에 맞서는 동료 학생들의 갈등을 다룬 소설인데, 이 갈등은 학생들의 항거가 아니라 그간 ‘석대체제’를 묵인하던 담임선생님의 생뚱맞은 개입으로 해소된다.
그리스 연극에 등장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처럼 제3의 인물, 신적 초인이 등장해 단박에 문제를 쓸어버리는 방식, 보수는 늘 이런 해법을 열망한다. “그(운동권 정치) 청산의 칼자루를 쥐고 한국 정치의 신주류로 등장한 것이 윤석열, 한동훈이 주축이 되는 이른바 ‘검찰’이다. 거기에는 과거 운동권이 정권을 장악했던 것처럼 어떤 시대적 당위가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운동권 특권을 교정할 수 있는 적임자는 사정 기능을 가진 검찰일 수밖에 없다.”(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그들에게 군부-검찰은 백마 탄 기사다.
보수가 시대감각을 회복해 정당을 정당답게 정상화하지 못한다면, 기후변화나 인공지능(AI) 등 미래 어젠더를 끌어안지 못한다면 위기는 장기화될 것이다. 그런데 진보정당은 다를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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