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2차대전’은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책&생각]
추축국이 추구한 새로운 제국주의 주목
민족 앞세운 국가 차원의 총동원전
제국주의 결과로 ‘피와 폐허’만 남아
피와 폐허 1·2
최후의 제국주의 전쟁, 1931~1945
리처드 오버리 지음, 이재만 옮김 l 책과함께 l 각 권 3만8000원
1933년 나치가 집권한 독일은 1차대전 패전의 결과로 해제당했던 무장을 다시 시작했고, 급기야 1939년 9월1일 폴란드를 침공한다.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이를 2차대전의 시작점으로 본다.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 민족은 “더 넓은 생존공간(Lebensraum)을 가질 권리가 있다”며 1937년 이미 ‘팽창’ 계획을 세웠고, 그 이듬해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상태였다. 체코 때와는 달리, 유럽 최대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침공에 반응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 그 뒤 전개되는 전쟁의 큰 방향을 결정했다.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77·영국 엑서터대 교수)는 2021년 펴낸 ‘피와 폐허’에서 기존과는 다른 시각으로 2차대전을 두껍게 기술한다. ‘더 타임스 세계사’를 총괄편집하고 ‘독재자들’ 등 숱한 저작들을 펴냈지만, 정작 오버리가 2차대전을 통사로 다룬 것은 70살 넘어서 써낸 이 책이 유일하다. 2차대전을 ‘장기 2차대전’으로서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이라고 풀이한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전쟁의 배경과 전개 과정에서부터 전시 경제와 국가 동원, 전쟁범죄와 잔혹행위, 전쟁에서 흐르는 ‘감정지리’에 이르는 여러 측면들까지, 2차대전의 핵심을 모두 아우른다.
2차대전이 ‘장기 2차대전’인 이유는, 기존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독일·일본·이탈리아 세 나라가 ‘새로운’ 제국주의를 추구하면서 벌어진 전쟁이기 때문이라 본다. 1차대전은 제국주의 야망을 가진 국가들이 세계 전역에서 치른 전쟁이었고, 열강들은 그 전쟁의 결과에 따른 수혜까지도 거둬들이며 제국주의적 지배를 유지했다. 그러나 교육 확대, 급속한 사회 이동, 중앙집권적 국가기구의 진화와 맞물린 경제 근대화 등은 세계 전역에서 광범위한 변화를 몰고 오고 있었고, 그 와중에 후발 국가인 독일·일본·이탈리아가 기존 제국들처럼 국외에서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제국주의를 추구하며 분쟁을 낳았다는 풀이다.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자주권이 없다는 인식에서 자라난 분노는 평화적 협력과 민주적 정치에 기반하는 ‘서구적’ 또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점점 더 거부하도록 부추겼다.”
1928년 시작된 전 세계적인 경기후퇴가 여기에 불을 붙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유무역을 포기하고 자국에만 유리한 경제블록을 만드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했고, 이는 협력을 추구하는 국제주의 모델이 그 일말마저 사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일본에서는 1920년대 민주주의 실험이 저물고 군부가 득세했으며, 독일에서는 국가사회주의당이 힘을 얻고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 혁명이 일어났다. 민족에 대한 열망을 동력으로 삼아, 이들은 ‘인종과 공간’을 중심으로 한 국가-제국을 추구하며 기존 열강들을 상대로 이익권 다툼에 나서게 된다. 흔히 히틀러, 무솔리니, 일본 군부를 2차대전을 낳은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지은이는 이들이 차라리 위기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1931년 일본이 대륙 침략을 위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부터 2차대전에 대한 서술을 시작한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당이 장악한 이탈리아는 1935년 에티오피아 침공으로, 나치 독일은 1938년 체코 침공으로 각각 영토 팽창을 시작했다. 이 국가들은 왜 영토제국이 되길 추구했는가? 지은이는 ‘민족’ 개념이 영토제국 추구의 원천이며, 서구식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다른 모델로 경제적 이득을 추구할 동기가 있었음을, 또 흔들리는 전후 질서의 혼란상이 이들에게 ‘기회’라는 인식을 심어줬음을 지적한다. 애초 이들은 대규모 국제전까지 기획하지 않았고, 팽창 전략은 체계적이기보다는 임시변통에 가까웠다고 한다. ‘총력전’을 예견했던 쪽은 되레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 영국과 프랑스였다. 자신들이 국제 질서를 재편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된 독일·일본·이탈리아는 1940년 9월 삼국동맹 조약을 통해 공식적으로 한편이 되는데, 각각 유럽 대륙, 지중해 분지와 아프리카, 동아시아를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들이 꿈꾸는 지정학적 상상과 지정학적 현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고, 이 간극은 “인종적 오만과 군사적·지리적 현실을 애써 무시하는 태도로만 메울 수 있었다.” 이들의 식민지는 공통된 통제 구조 없이 군사적 목적으로만 운영됐으며, 처형과 고문, 절멸 등의 조처들이 만연했다.
이에 맞섰다고 해서 연합국의 전쟁이 ‘선한 전쟁’은 아니었다. 루스벨트와 처칠이 발표한 ‘대서양헌장’(1941)은 “자신들이 살아갈 정부의 형태를 선택하는 모든 국민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영국·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민주적인 모국이 아니라 그들의 거대한 식민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전쟁을 치렀고, 여러 나라의 주권이나 유대인 절멸 등은 주된 관심사도 아니었다. 처칠은 대서양헌장이 “식민제국의 유색인종들에게 적용”되지 않고 유럽 국가들과 민족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편적 권리의 언어를 앞세운 연합국의 서사가 ‘특정 국민과 영토 정복의 권리를 방어’한다는 추축국 서사보다 소구력이 있었을 뿐이다.
‘총력전’으로서 2차대전의 의미를 자세하게 파고든 대목은 이 책의 백미다. 산업기반부터 교육, 관료제 등을 두루 갖춘 현대국가만이 대규모 전쟁을 치를 수 있지만, 이를 동원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도덕적 결속체’가 필요했다. 근대의 산물인 민족주의와 시민권 개념은 “국가의 소멸과 제국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이 같은 총력전을 가능하게 한 요소였으며, 이는 군대와 민간의 경계를 지워버림으로써 유례없이 큰 규모의 민간인 피해와 전쟁범죄·잔혹행위를 낳았다. 1차대전 이후 ‘반전’ 목소리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총력전 분위기 속에 극히 소수만이 발언했을 뿐이다.
2차대전의 결과, 제국주의는 막을 내리고 식민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하며 세계는 ‘국가’들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제국과 다름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적어도 “토착 인구를 직접 복속시키고 그들의 주권을 빼앗던 영토제국”들은 사라졌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의 시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처절했던 ‘피와 폐허’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새겨야 할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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