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겪은 김훈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책&생각]
건강위기 전후 2020년대 판본
앎-모름의 경계 삼엄한 문장
‘목줄’의 사유로까지 오롯이
허송세월
김훈 지음 l 나남출판 l 1만8000원
작가 김훈(76)이 5년 만에 내놓은 새 산문집 제목은 ‘허송세월’이다. 2019년 출간된 ‘연필로 쓰기’ 이후 5년 만의 에세이, 소설도 치면 ‘하얼빈’ 이후 2년 만의 만남이다. 전후 작가는 아팠고 좀더 늙었다. 쉰둘에 펴낸 산문집 ‘자전거 여행’(2000)에서 서언과도 같이 사진 속 “눈 덮인 겨울 도마령을 홀로 넘어가는 ‘자전거를 탄 김훈’”은 이제 “오후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24년치 이런 전이엔 반전이 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그땐 가서야 보이고 쓰이던 것들이 이젠 보이므로 가고 쓰게 되는 지경이랄까. 에세이 ‘허송세월’은 김훈의 2020년대 판본이다.
글감만 추리건대, 새와 생사, 일산 호수공원, 밥, 부고, 장례, 병고, 입원 등 직접 경험에서의 고백부터 그가 여전히 동경하는 청춘과 여실히 포용하는 말로(末路), 똥바가지 같은 근현대 물건들, 지금껏 쓴 소설의 여적, 글쓰기, 언어관, 나아가 당대 저출산과 산재 사망, 사회적 참사, 이념 과잉 따위 현안에 이르기까지 김훈은 ‘김훈대로’ 쓴다. 대개 안다고 허세를 떨 때 김훈은 모른다고 ‘허세’를 부린다. ‘모른다’와 ‘안다’의 경계를 근위하는 그 문장들은 여태 삼엄하다.
“‘안다’는 것은 책 읽고 나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안다’는 삶을 통과해 나온 후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쓰기 어려운 말이다.”(19일 한겨레에 팩스로 보낸 서면 답변)
코로나 팬데믹 때 김훈은 심장질환으로 열흘가량 입원했다. 혼수상태에 빠져 24시간 만에 깨어났다. “죽지 않은 자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으므로, 인간은 죽음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전할 수 없고 설명 받을 수 없을 터인데, 그날 밤의 혼수상태 속에서 나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경험할 수 있었고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창졸간 너머 보고 들은 것을 깨자마자 적으려고 취재수첩을 찾는데, 한겨레에 답한바 “괴로운 직업병”이요, 벗어나지 못할 “병통”이 있을 뿐이라, 김훈은 “이 세상에 땅이 있어서 인간의 걸음을 받아 주었다”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길 잘했구나” 퇴원 후 그 다행함을 책에 쓴다.
문학이 본디 그러할진대 특히 죽음을 빼고 김훈의 문학을 말하긴 어렵다. 장편 ‘칼의 노래’, ‘하얼빈’ 속 죽음은 물론이요, 2004년 이상문학상 받은 단편 ‘화장’, 가령 일평생 종교 아래 헌신하다 병들어 “기도 싫어요. 간구하면 잠이 더 안 와요. 신부님, 자고 싶어요, 영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토로하다 영면하는 늙은 수녀 이야기(‘저만치 혼자서’)까지…. 이 모든 죽음의 형색을 작가는 이렇게 갈무리한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었다.”
죽음은 팩트주의자에게 팩트가 가장 자명해지는 때고, 결벽의 문장가에게 “웃자라서 쭉정이 같고, 들떠서 허깨비 같은 말들”이 겨우 퇴각하는 때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2000년 ‘자전거 여행’의 이 사유에서 변한 게 있다면, 봄꽃 대신 사철 부음이 휴대폰 문자로 당도한다는 점. 가고 오는 게 섭리인데 인간의 본성엔 가고말고가 없다.
“여기저기서 또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죽음이 한 주제일 뿐, 이 산문 어느 한 대목도 염세나 비관과 거리가 멀다. ‘허송세월’이 자조가 아니듯 말이다. 되레 술, 담배에 관한 고백은 제아무리 문장의 밀도를 높일망정 독자들은 웃고 말 거다. 욕지거리, 악다구니, 상소리, 저주, 증오, 과장, 거짓말로 가득한 정치 현수막 아래 키스하는 청춘을 보러 세종로 간다거나, 대입수능일 욕망과 진심 충만한 학생들 보러 매해 학교 찾아간다는 그를 따라가고 싶다, 세월호·이태원 참사, 산재사망에 누구보다 통렬해지는 그를 따라 궐기하고 싶다.
이번 산문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로 ‘목줄’을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목줄’은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불완전한 세상의 다른 말이거니와 억압과 비루의 상태, 목줄을 씌워 쥐려는 권력구조, 반전과 혁명의 역동, 역사 속 청춘-찰스 다윈, 정약전, 정약용, 이벽, 이승훈, 황사영, 안중근과 같은-에 대한 사무침, 그럼에도 엄연한 불가능성의 세계관을 압축하고 있다.
“인간은 짧은 줄에 목이 매여서 이념, 제도, 욕망, 언어, 가치, 인습 같은 강고한 말뚝에 묶여 있다.” 심지어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짧게 묶여 있다. (…) 다들 제 자식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과연 ‘목줄’은 어감만으로 읽는 이를 죈다. 김훈은 불완전한 생을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할지언정 써나갈 뿐이다. 이 믿음 때문이겠다. “불완전한 세상에는 그 불완전을 살아내는 불완전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은 허약하지만 소중하다.” 전체 45편 글 가운데 ‘여덟 명의 아이들을 생각함’ 마지막 대목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아이들의 얘기다.
작가 김훈은 “건강”과 “몰골”을 이유로 대면 인터뷰는 마다했다. 팩스로 서면 인터뷰했다.
―다음 책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나는 늘 계획이 없이 살아간다. 그러나 몇달씩 들어앉아 있다 보면 원고 부스러기들이 쌓인다. 대부분 버리는 것이기는 하지만.”
김훈은 계속 연필 깎고, “金薰(김훈)” 새겨진 원고지에 글 쓴다.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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