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곳에 어떤 마음으로 갇혀 살까…20년 고민한 ‘돼지 복지’ [책&생각]
‘돼지들은 어떤 마음으로 견뎌내고 있을까’
동물복지 관점에서 돼지 사육 농장 개선책 모색
돼지 복지
공장식 축산을 넘어, 한국식 동물복지 농장의 모든 것
윤진현 지음 l 한겨레출판 l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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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자원학부 3학년 학생 윤진현은 2004년 5월 목장 실습 과목을 이수하느라 양돈장을 처음 방문하고서 큰 충격을 받았다. 돼지들이 놓여 있는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사방이 막혀 있어 햇빛 한 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돈사, 비좁은 철제 스톨(칸막이)에 갇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임신돈들, 파리 떼에 뒤덮여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어미 돼지들, 눈과 코를 마비시킬 정도의 지독한 악취가 진동하는 돈사에서 온몸이 분뇨로 덕지덕지 얼룩진 채 누워 있는 돼지들. (…) 이런 곳에서 몇 달씩 갇혀 사는 돼지들은 어떤 마음으로 견뎌내고 있을까.”
이 질문이 그로 하여금 여느 학생들과 다른 길을 걷게 했다. 사료 회사에 취직하는 대신 ‘친환경 축산’이라는 막연한 주제를 붙들고 대학원에 진학한 데 이어,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동물복지’를 연구하고자 머나먼 핀란드로 유학을 떠나게 한 것이다. 헬싱키대학에서 수의학박사(동물복지 전공) 학위를 받고 돌아와 전남대 동물자원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는 그의 첫 책 ‘돼지 복지’는 그가 핀란드와 한국에서 목격한 돼지 농장 사육 실태를 보고하고, 사육 돼지의 복지 증진을 위한 실천 방안과 개선책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현대식 축산의 집약적 생산 시스템의 문제를 대중에게 알리고 동물복지 논의를 촉발한 것이 영국 활동가 루스 해리슨의 1964년 저작 ‘동물 기계: 새로운 공장식 축산’이다. 동물을 단순히 생산성 향상과 수익 창출을 위한 도구로 여기며 열악한 환경과 시설, 비인도적 사육 관행을 유지하는 현실을 고발한 현대의 고전이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여론에 떠밀려 영국 정부는 실태 조사를 거쳐 보고서를 발표했고, 1966년에는 ‘농장동물복지위원회’를 설립해 연구와 법령 제정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World Organisation for Animal Health)는 동물복지를 “동물이 건강하고 편안한 상태에 있으며, 양호한 영양 상태 및 안전한 환경에서 본성을 나타낼 수 있고, 고통, 두려움, 괴롭힘 등의 부정적인 심리적 상태에 있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지은이 윤 교수는 “적절한 거처, 관리, 영양, 질병 예방 및 치료부터 책임감 있는 돌봄, 인도적인 핸들링(다루기), 필요 시 인도적 안락사까지 동물에게 신체적,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을 인간이 책임감을 가지고 제공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한다.
효율과 생산성을 우선시하는 공장식 축사에서 돼지들은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강요당한다. “어미 돼지는 임신 기간 중에는 임신 스톨에, 분만 후 젖을 먹이는 기간에는 분만틀에 갇혀 평생 일어서기, 앉기, 엎드리기, 눕기만 가능한 공간에서 출산과 젖 먹이기를 반복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새끼 돼지는 태어나자마자 송곳니와 꼬리가 잘린다. 그중 수컷은 거세되고 번식 능력이 있는 암컷은 표식을 위해 귀의 살점이 잘린다. 대부분 이러한 시술은 마취 없이 진행된다.”
새끼 돼지의 꼬리를 자르는 까닭은 좁은 공간에 갇힌 돼지들이 스트레스로 인해 동료의 꼬리를 물어뜯기 때문이다. 보통 생후 사흘째에 꼬리를 자르는데, 3일령 새끼 돼지의 꼬리에는 신경계가 매우 잘 발달해 있어서 절단하는 순간부터 돼지는 매우 큰 통증을 느끼며 잘린 부위에 염증이 생기기도 한다. 책에는 거세당하는 돼지가 내지르는 괴성과 울음소리, 근육 떨림, 무기력증 같은 통증 반응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지은이는 “적정 사육 공간, 행동 풍부화 기회, 적절한 환기, 신선한 사료와 음수, 충분한 깔짚” 등을 제공하면 꼬리 물기 피해를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는 유럽의 연구 결과를 대안으로 소개한다. 그는 또 외과적 거세 전에 국부 마취제와 진통제를 함께 처방하도록 한 유럽의회 규정이 현실성 결여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며, 외과적 거세를 대체하는 면역 거세, 그리고 아예 거세 없이 수컷 돼지를 온전하게 출하하는 방법 등을 알려준다.
지은이는 자신이 박사 후 연구 프로젝트로 수행한 핀란드의 동물복지형 농장 설계와 국내 1호 동물복지 인증 양돈장인 더불어행복한농장의 사례를 통해 돼지 복지의 구체적 실천 방안 역시 제시한다. 핀란드 농장에서는 임신사 한쪽에 지푸라기를 깔고 턱을 설치해 쉬는 곳과 분뇨 배설 자리를 구분하고, 공동 육아를 위해 다섯 마리의 어미 돼지들이 새끼들을 함께 키우도록 하며, 4주차에 이루어지던 이유를 9주차로 늦춤으로써 새끼 돼지들이 어미, 형제들과 더 오래 함께 지내며 더욱 건강하게 자라도록 했다. 경남 거창의 더불어행복한농장의 경우 어미 돼지의 둥지 짓기 본능을 충족시키고자 천 자루를 제공했고, 비육사의 바닥에는 왕겨와 보릿짚을 두툼히 깔아 줌으로써 돼지들이 본연의 행동을 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지은이는 또 갈수록 심각해지는 항생제 내성 병원체(슈퍼 박테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신의 실험과 연구 결과를 소개하며 “농가 방역 체계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동물 친화적인 사육 환경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동물복지문제연구소 어웨어(AWARE)가 2021년 국내 양돈 농가 13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81곳(60.4%)이 동물복지 농장으로 전환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역시 어웨어가 성인 2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동물복지 기준이 높은 축산 제품을 구매할 의향은 91.8%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도가 시행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참여율이 0.3%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것은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을 지급하고도 안전하고 질 높은 축산물을 구매할 의지를 갖추어야 하며, 동물복지 인증제도는 비현실적 규정을 손보고 항목별·등급별 인증 방식을 도입하는 등 단계별로 차근차근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으로 책은 마무리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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