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 매미가 되어 일제히 함께 날아오르자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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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이든 자신의 고통이든 참혹한 풍경 앞에서 눈부터 질끈 감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사작용일지도 모른다.
한 고통이 방사하는 감정들이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또 다른 고통을 흔들어 깨울까 두렵고 그렇게 깨어난 고통이 우리를 안에서부터 집어삼킬까 두려운 탓이다.
그러나 이브 엔슬러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를 글로 써내는 행위가 오히려 하나의 생존 방식이며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이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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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이브 엔슬러 지음, 김은지 옮김 l 푸른숲(2024)
타인의 고통이든 자신의 고통이든 참혹한 풍경 앞에서 눈부터 질끈 감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사작용일지도 모른다. 한 고통이 방사하는 감정들이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또 다른 고통을 흔들어 깨울까 두렵고 그렇게 깨어난 고통이 우리를 안에서부터 집어삼킬까 두려운 탓이다. 그러나 이브 엔슬러는 고통을 똑바로 바라보고 이를 글로 써내는 행위가 오히려 하나의 생존 방식이며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이들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등뼈의 윤곽이 드러나는 누군가의 엎드린 모습을 표지에 담은 책 안에는 저자가 45년간 파괴와 폭력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을 ‘향해’ 혹은 ‘위해’ 혹은 ‘함께’ 써 내려 간 산문과 시, 편지, 에세이들이 담겨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전부 가정폭력, 친족 성폭력,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이지만 저자는 이들의 피해자성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우선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성폭력, 이를 외면해온 어머니의 무기력한 방관부터 증언하는데, 고통의 복기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글쓰기가 어떤 실패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지 솔직하게 말한다. “그래, 이번에는 쓸 수 있을 거야. 단어가 비로소 의미를 만나면, 나의 갈망과 닿으면, 진실과 아주 조금이라도 닮게 되면, 내 어린 시절의 구타와 강간이 남긴 기억 상실 그리고 파편화된 지성이라는 균열을 넘어서면, 나 자신과 나의 글을 비로소 온전히 쓸 수 있게 되면, 나의 언어가 어둠 속에서 고유한 빛을 발하며 신성한 품위와 명료함을 지니게 되면, 그래, 이번에는 정말 그런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자신의 고통에서 출발한 구원의 글쓰기는 난민, 노숙자, 여성, 흑인, 환자 등 타인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이중 읽기에 가장 힘든 부분일 수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의 판지 병원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전쟁 무기로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심각한 상처를 입고 찾아오는 판지 병원은 몸의 내부 조직이 찢어져 생긴 누공으로 수술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여성들의 몸에 뚫린 구멍은 ‘영혼에 새겨진 구멍’이자 ‘자부심과 자신감, 정신과 빛과 소변이 새는 구멍’이고 여기서 새어 나온 소변이 병원 바닥에 웅덩이로 고이고 냄새까지 퍼져가지만, 놀랍게도 이 여성들은 춤을 춘다. 서구 단체의 지원을 받아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무퀘게는 ‘댄스 경연’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여성들의 넘치는 생명력을 보며 매일 이곳에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이 대목이야말로 저자 이브 엔슬러가 글쓰기를 통해 읽는 이들까지 고통의 언저리로 끌어들여 함께 춤추게 하는 놀라운 순간이다. 이를 연대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에 관해서도 저자는 연대란 ‘서로 간의 거리를 보장해 주기에 안락한’ 동맹과 달리 ‘모두의 문제’이며 ‘기꺼이 선을 넘어 우리 모두를 위해 투쟁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런 저자의 생각이 ‘매미’라는 시에 선연하게 표현되어 있다. “쏘지도 물지도 못하는 매미들에게/ 유일한 방어책은 수백만 마리가 일제히 함께 날아오르는 것”이라고.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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