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삼킨 당신이란 창문에도 어떤 빛은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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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두 글은 '시와 소설, 그림 사이를 거니는 저녁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피터 데이비드슨의 '불이 켜진 창문'에서 가져왔다.
모두 빛 또는 창문이 나오는 글들이다.
'불이 켜진 창문'은 간단히 말하자면 저녁 산책길에 떠오른 불이 켜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대한 (혹은, 빛을 향한) 글이다.
피터 데이비드슨의 글은 정말 아름답게 감각을 자극해서, 마음을 열린 창문처럼 만들어 빛이 마음의 여기저기를 드나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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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진 창문
시와 소설, 그림 사이를 거니는 저녁 산책
피터 데이비드슨 지음, 정지현 옮김 l 아트북스(2024)
“양아버지가 돌아오면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방에만 있으시오. 그가 방으로 자러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창의 덧문을 열고 걸쇠를 풀고 램프를 올려놓고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시오. 그다음에는 조용히 예전에 쓰던 방으로 들어가시오.”(‘셜록 홈스: 얼룩끈의 비밀’)
“그들은 몸을 돌려 창문이 금빛 테를 두른 고요한 집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사랑의 성지였다. (…) 어쩌다 두 사람은 전등불이 깊고 모퉁이가 환하게 빛나고 양쪽으로 합승 자동차가 계속 달리는 이 거리를 함께 걷게 되었을까?”(‘밤과 낮’, 버지니아 울프)
“난 겨우 팔십 크라운이라는 적은 월급을 받으며 여덟시부터 아홉시까지 끝도 없이 일합니다. 나는 사무실 밖에서의 시간을 야수처럼 탐합니다. 언젠가는 외국에 나가 의자에 앉아, 창밖으로 사탕수수밭이나 무슬림의 공동묘지를 내다보고 싶습니다.”(‘카프카의 세계’, 레이먼드 카버)
앞의 두 글은 ‘시와 소설, 그림 사이를 거니는 저녁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피터 데이비드슨의 ‘불이 켜진 창문’에서 가져왔다. 세 번째 글은 ‘불이 켜진 창문’을 읽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카버의 시다. 모두 빛 또는 창문이 나오는 글들이다. ‘불이 켜진 창문’은 간단히 말하자면 저녁 산책길에 떠오른 불이 켜진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대한 (혹은, 빛을 향한) 글이다. 한 권의 책 안에 얼마나 많은 빛 이야기가 있는지 기억나는 대로 이어 붙이기도 숨가쁘다. 비 내리는 오후의 이발소 불빛, 순식간에 사라지는 겨올 오후의 빛, 은색 눈송이가 날리는 날 가로등 빛, 외진 곳을 달리는 기차의 빛, 유령이 나오는 괴담 속 폐허가 된 집을 감싸는 빛, 홈스와 왓슨이 잠복해 있을 때 맞은편 집에 들어오던 불빛, 이제 막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의 어깨에 떨어지는 불빛,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집의 불빛,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모두 휴양지로 떠난 뒤 도시에 남은 사람들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무겁고 답답한 불빛, 외로운 야간 여행자의 자동차 불빛, 부엌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편안함을 주는 평화로운 버터 같은 빛, 한밤중 경찰차의 불빛, 정말 일찍 어두워지는 시골의 불빛, 달이 빛나는 밤 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빛에 관한 묘사로 가득하다. 피터 데이비드슨의 글은 정말 아름답게 감각을 자극해서, 마음을 열린 창문처럼 만들어 빛이 마음의 여기저기를 드나들게 만든다. 마음에 ‘어두움’은 있어도 그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빛과 뒤엉켜 있게 만든다. 읽다 보면 새삼 놀라게 된다. 빛이 얼마나 섬세한 단어인지,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감추고 있는 말인지, 얼마나 많은 기억을 감추고 있는 말인지, 얼마나 많은 것을 연상시키는 말인지, 얼마나 신비롭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인지. 기억 속 불이 켜진 창은 덧없고 사소한가 아니면 반대로 중요하고 영원히 불이 켜져 있는가. 인생에 명암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빛 한 점 통과할 수 없는 어두운 마음의 상태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으로서, 상상력이 마음에 드리우는 빛과 어둠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어두움을 빛과 연결시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이 소중하다.
어쨌든 빛이 중심이다. 모든 것이 거기로 모여든다. 어쨌든 누군가는 빛을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는 어둠 속에서 신비롭고 빛이 나는 자아를 꺼내려고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인류는 그렇게 살아왔던 듯하다.
정혜윤 시비에스(CBS)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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