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공간’이라니 [책&생각]

최원형 기자 2024. 6. 21.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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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쓴 '피와 폐허'를 읽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력이었던 2차대전을 다시 곱씹습니다.

오버리는 '히틀러·무솔리니·일본 군부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납작한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2차대전을 영국·프랑스 같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반발한 독일·일본·이탈리아 등 후발 국가-제국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로 풀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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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거리
서울대 팔레스타인 연대 동아리 ‘수박’ 학생들이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에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의 ‘인종학살’에 반대해 미국 대학생들이 학내에서 벌이고 있는 시위에 연대하는 집회를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쓴 ‘피와 폐허’를 읽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폭력이었던 2차대전을 다시 곱씹습니다. 오버리는 ‘히틀러·무솔리니·일본 군부가 전쟁을 일으켰다’는 납작한 서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2차대전을 영국·프랑스 같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과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에 반발한 독일·일본·이탈리아 등 후발 국가-제국들 사이에 벌어진 충돌로 풀이합니다.

‘생존공간’(Lebensraum)은 이 후발 제국들이 지닌 기본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입니다. 단순히 말해,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선 정복을 통해서라도 나라 밖의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절실하고 불가피하다는 주장입니다. 침략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행위가 생존을 위한 ‘자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저 살기 위해선 침략하는 것이 어쩔 수 없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가 ‘대륙에서 일본 열도를 향해 뻗은 칼’이라 위험하니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례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한반도 침략 뒤 내걸었던 ‘대동아공영권’은 바로 일제가 아시아에서 추구했던 ‘생존공간’이었죠.

2차대전이 끝나고 ‘국가’들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국의 시대는 과연 완전히 저문 것일까요? 1920년대 말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제국주의 열강들이 각자도생을 꾀한 것이 후발 제국들의 제국주의적 욕망에 불을 붙였다는 오버리의 진단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자지구에서 ‘생존공간’을 앞세우는 새된 목소리는 높고, 반전과 평화를 말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끔찍한 ‘피와 폐허’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최원형 책지성팀장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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