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로비에 '베를린 소녀상' 철거 수순... 한국 정부 '무대응' 속내는
2020년 베를린 설치 4년 만 철거 수순
"영구존치" VS. "철거 불가피" 대립 속
"한일 관계 영향 줄라"... 정부 '무대응'
"평화의 소녀상은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유엔이 '세계 전시 성폭력 추방의 날'로 정한 1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런 구호가 울려 퍼졌다. 100여 명의 집회 참가자 앞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평화의 소녀상(소녀상)이 있었다. 소녀상은 한국 정의기억연대(정의연)와 독일 코리아협의회(코협)가 중심이 돼 2020년 9월 설치했지만, 현재 철거 위기에 놓여 있다.
"소녀상, 변화 필요... 해결해야" 철거 시사한 독일
베를린 브레머 거리와 비르켄 거리 모퉁이에 있는 소녀상의 운명은 설치 이래 늘 위태로웠다. 일본군 만행을 알리는 조형물이 달갑지 않은 일본이 지난 4년간 독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상대로 전방위 로비를 벌였기 때문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2022년 5월 일본을 방문한 올라프 숄츠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위안부상이 계속 설치돼 있는 것은 유감"이라며 철거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4년을 버틴 소녀상에 대한 철거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약 한 달 전. 카이 베그너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도쿄 자매결연 30주년을 맞아 방문한 일본 도쿄에서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장관과 만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소녀상 철거를 시사했다. 그는 "여성 폭력 반대 기념비 건립을 약속했으나 일방적인 대표성을 띠어서는 안 된다"며 "지역구 및 연방 정부를 포함해 모든 사람과 접촉하고 있는데 독일 주재 일본 대사도 논의에 참여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베를린시가 철거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전시 성폭력 알려야" VS. "설치 권한은 독일에"
시민사회는 그러나 '소녀상 영구 존치'를 주장하고 있다. "①소녀상은 위안부 피해자의 용기를 존중하는 것이자 가해국 일본의 범죄를 기억하는 수단이며 ②전시 성폭력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보편적 여성 인권의 상징이기 때문"이란 이유다. 이날 집회에 참석한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인권 활동가 이바 야쿠보우스카, 카트리나 타라부키나도 "지금도 러시아군에 의한 전시 성폭력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지 않느냐"며 "소녀상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미래에 대한 것이므로 함부로 철거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면 조형물 설치·철거 권한을 가진 미테구, 베를린시 등 독일 지방자치단체의 입장은 '언제든지 철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렇다. ①설치 직후부터 현재까지 독일은 '조형물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지 모른 채 설치 허가를 내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②한일 관계 갈등 요소인 소녀상을 도시 한가운데 두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일본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2020년 슈테판 폰 다셀 당시 미테구청장은 소녀상에 대해 "독일에서 처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정치·역사적으로 격렬하고 복잡한 두 국가 간 갈등"이라고 평가했다.
③절차적으로 '억지 철거'라 보기도 어렵다. 미테구는 2년 기한으로 소녀상이 설치된 뒤(2020년 9월)→일본 측 항의가 빗발치자→설치 허가를 취소(2020년 10월)했다가→코협의 가처분 신청 및 비판 여론이 일자 두 차례 걸쳐 설치 기한을 2024년 9월로 늘렸다. 예정된 기한이 종료된 후 처분은 미테구 결정 사안이라는 것이다. ④공공장소에 조형물을 영구 설치하려면 공모 등 특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소녀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은 '전방위' 개입하는데... 한국 정부 뒷짐?
시민단체는 "한국 정부가 힘을 보태줘야 한다"(한정화 코협 대표)고 주장하지만 한국 정부는 사실상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 설명을 종합하면 이유는 이렇다. ①일단 독일 지자체 권한을 한국 정부가 침해하는 듯한 모양새가 될까 우려스럽다.②소녀상을 시민단체와 지차체 간 문제로 선을 그은 것은 문재인 정부 때부터 이어온 '암묵적 원칙'이기도 하다.③한국 정부가 나서면 소녀상이 한일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오히려 독일에 철거 명분을 줄 수도 있다.
④속내는 윤석열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선 상황과 맞물려 있다. 한국 정부가 '철거하지 말자'는 식의 말을 보태면 일본과의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철거에 찬성하면 거센 국민적 반발이 예상된다.
그러나베그너 시장이 일본 외무장관과의 대화 테이블에 소녀상을 올리고, 일본 대사를 소녀상 해결책 논의에 포함시키겠다며 일본 정부 개입을 '공식화'하는 등 상황이 변했음에도 한국 정부가 전례를 들어 침묵을 고수하는 건 무책임하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현 상황이 유지된다면 소녀상 철거 쪽에 더 무게가 실릴 것으로 보인다. 소녀상 설치 후 베를린 시장이 소녀상 문제에서 일본 측 입장을 우선시하는 인사로 교체되고(사회민주당→기독교민주연합), 그간 소녀상 영구 존치를 지지해온 독일 녹색당 등이 예전처럼 소녀상 문제에 적극적이지 않다. 미테구의회에서 20일 '소녀상 영구 존치' 결의안이 논의되지만, 구속력은 없다. 코협 등은 소녀상 철거를 막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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