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유월, 그날의 눈물들
피란수도 부산도 비극 간직…아픈 진실 찾아서 밝혀내야
김요아킴 시인·부산 경원고 교사
얼마 전 고향에서 거행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에 참석했다. 이전에도 몇 번 참석해 유족들을 위로하는 추념의 시를 낭송하곤 했었는데, 이번 행사는 희생자들이 수장당한 괭이 바다가 먼발치로 보이는 가포 해안가 추모위령탑에서 열렸다. 이 탑은 그간 창원 유족회 회장을 비롯한 여러 회원이 창원시를 상대로 희생자들의 추모공간을 요구하면서 2022년 11월 26일 ‘그날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조형물과 함께 당시 희생된 500여 명의 명단을 새겨 세우게 된 것이다.
사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한국전쟁 관련 얘기는 당시 9살이던 아버지가 포성 소리와 함께 인민군이 인근 진동까지 내려왔다는 소문에 가족과 피란 짐을 꾸렸다가 기실 마산 밖으로 더는 피난 갈 곳이 없다 여겨 도로 짐을 풀었다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이곳은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비껴간 곳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유족회에 따르면 이 시기에 민간인 2300여 명이 재판 없이 불법으로 학살되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예비검속된 이들과 마산형무소에 수감된 정치 사범들이 인근 야산 골짜기에서, 혹은 바다에서 단지 북한에 동조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고통스러운 건 남은 가족이 죽음의 이유도, 또 언제 제사를 지내야 할지도 모른 채 빨갱이 자식이라는 연좌의 굴레 속에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세월이었다.
마침 이날 행사에서 1950년 8월 18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무고하게 희생된 아버지를 둔 따님이 올해 1월 17일 창원지법 재심에서 마침내 무죄 선고를 받아내고 그간 아버지 없이 자란 절절한 사부곡(思父曲)을 읽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우리 사회가 희생자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겨레21의 고경태 기자가 쓴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라는 부제가 달린‘본 헌터(bone hunter)’란 책을 읽으며 당시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로이 깨달을 수 있었다. 충남 아산 성재산에서 무더기로 발굴된 희생자 유골의 독백과 체질인류학자로 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다는 관점에서 그 흔적을 쫓는 박선주 교수의 이야기가 교차되는 이 책은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찾는 과정을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책의 시작은 A4-5로 명명된 유골이 참호 속에 쪼그려 앉은 모습으로, 발굴되기까지 무려 2만 6440일이라는 그 긴 세월만큼 실종된 전쟁의 또 다른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특히 어린 중학생의 죽음, 천농(天農)이라 새겨진 교복 단추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이어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의 유골까지 집단 학살된 장면을 고스란히 독자에게 목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와 이듬해 1.4 후퇴 국면에서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적 구원(舊怨) 관계와 집안 간의 알력, 그리고 잔존 하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 등이 전쟁이라는 이념적 이데올로기의 분위기에 편승해 고발과 낙인, 색출과 학살로 이어지는 광기의 현장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민간인 학살 사건은 무차별적인 부역 혐의를 씌워 혹은 군경, 나아가 미군에 의한 행위까지 전방위적이었으며, 그 희생자 수가 100만에 육박할 것이라는 한 통계 자료는 이제 신빙성 있게 들려오고 있다.
당시 피난 수도였던 부산도 이 같은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산 형무소뿐만 아니라 신평동 동매산, 반송동 운봉마을, 영주동 부산터널 위 야산과 청사포, 오륙도, 혈청소 인근 해상까지 학살된 주검들이 매장과 수장이 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피란민이 몰려든 데다가 다른 지역 재소자까지 수감되어 그 규모는 지금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실정이다.
이제 며칠 뒤면 6월 25일이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과 같은 국가폭력으로 인한 비극은 사라져야 하며, 그날 흘린 그 눈물의 진실을 비록 부족한 한 편의 졸시로나마 되짚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동해와 남해가 나뉘는/ 그 서늘한 경계에서/ 목숨보다 더한 이념의 광기가/ 시퍼런 파도를 적셨던 그곳은/ 거센 소용돌이로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할/ 창백한 역사의 쉼표 어디메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 나와/ 새끼줄에 묶인 무수한 손발만이/ 전쟁이 터진 그해, 오로지/ 단 한 발의 총성도 아까워/ 확실하게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그곳은 지금, 유람선이/ 유행가를 매달고 하염없이/ 부산항으로 돌아오라 넘실대고 있지만/ 저 먼 쓰시마 해협까지 떠밀려 간/ 그때의 잔혹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좌우로 떠 있는 방패섬과 솔섬이/ 결국 우삭도 하나였음을 오륙도는/ 썰물처럼 여전히 노래하고 있다’ 오륙도 비가(悲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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