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찾아서… 추상미술 활짝 피다

마드리드=김민 기자 2024. 6. 2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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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미술거장 명작을 만나다]〈3〉 칸딘스키 ‘세 개의 점이 있는…’
과학의 발달-신지학 유행 등 영향… 다양한 형태-색으로 상상력 불지펴
극심한 경기 침체-급격한 변화 시기… 과도한 물질주의 맞서 내면 표현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미술 애호가라면 꼭 찾는 세 미술관, ‘골든 트라이앵글’이 있다. 세 미술관이 프라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해 붙여진 이름인데, 프라도 미술관, 왕립 소피아 미술관, 그리고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티센 미술관)이다.

추상으로 가는 과도기에 그린 ‘뮌헨의 루트비히 교회’(1908년) 옆에 서 있는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큐레이터 마르타 루이스 델 아르볼. 마드리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티센 미술관은 독일 귀족인 티센보르네미사 가문이 3대에 걸쳐 수집한 컬렉션을 전시한다.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그중 독일 표현주의 컬렉션이 유명하다. 이 미술관에서 20세기 독일 미술을 담당하는 큐레이터 마르타 루이스 델 아르볼을 만나 바실리 칸딘스키의 두 작품, ‘세 개의 점이 있는 그림, No. 196’(1914년)과 ‘뮌헨의 루트비히 교회’(1908년)에 대해 들었다.

●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한 그림

바실리 칸딘스키가 추상 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시기의 작품 ‘세 개의 점이 있는 그림, No. 196’(1914년).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제공
‘세 개의 점…’은 칸딘스키가 본격적인 추상 회화로 돌입할 무렵의 작품이다. 아르볼은 “칸딘스키는 이 시기 지금은 매우 유명한 글인 ‘예술에서 정신적인 것’을 썼고, 이를 통해 예술이 내면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을 ‘청기사파’ 작가들과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붉은 태양이나 배, 사람 같은 형상을 알아볼 수 있다. 세 개의 점은 그림 가운데에 뭉쳐진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덩어리를 뜻한다. 하나하나 분석하면 형태를 식별할 수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각기 다른 형태와 색의 조합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다.

“1910년 칸딘스키는 아널드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쇤베르크가 기존 음악 형식을 파괴해 만들어 낸 새로운 소리를 듣고 칸딘스키는 형태가 없어도 감정을 촉발하는 음악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죠.”

칸딘스키의 추상화는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느낌, 감각을 표현하려는 시도였다. 아르볼은 “칸딘스키의 윗세대인 사실주의, 인상주의 예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표현했다”며 “청기사파는 보이는 것을 넘어 더 깊은 영역과 연결되려 했는데 이는 당시 지식인들이 새로운 과학과 이론에 매료된 이유도 있다”고 했다.

이 무렵 X선이 처음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X선은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게 하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또 당대 지식인 사이에 유행한 신지학도 영향을 미쳤다. 신지학은 우주를 관통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봤다. 아르볼은 “칸딘스키는 다양한 형태와 색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고, 이 언어로 각기 다른 형태들의 조합을 실험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우주의 신비 같은 것을 표현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 오래된 것에서 답을 구하다

‘뮌헨의 루트비히 교회’는 칸딘스키가 완전한 추상화를 그리기 전 과도기의 작품이다. 뮌헨의 교회에서 조각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자세한 묘사보다 붓놀림을 최소화하며 대략적 형태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검은 윤곽선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독일 무르나우 지역의 유리 그림의 영향이다.

“유리 그림은 아카데미 미술과 관련 없이 민속 예술로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종교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누군가 병에서 회복했을 때 감사의 의미로 교회에 바쳤던 그림이었고, 예술과 생활의 구분이 없었죠.”

당시 독일은 제국주의 국가로 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문화의 우열을 가렸는데, 칸딘스키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토속 문화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이 무렵은 극심한 경기 침체, 급속도의 정보 교류와 사상의 발달 등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에 문명 밖 오래된 것에서 답을 찾으려 한 것이다.

아르볼은 “청기사파는 자신을 실제로 ‘악과 싸우는 기사’로 봤다”며 “현대 사회의 과도한 물질주의에 맞서고 모든 사람이 내면을 표현하고 마음을 열기를 바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100여 년 전에 그려졌지만, 현대사회에도 이어지는 고민이자 예술가의 오래된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마드리드=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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