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 개교 100주년 황푸군관학교, 이 곳이 `혁명 성지`가 된 이유
중국 현대사와 함께 했던 황푸군관학교가 지난 16일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황푸군관학교는 첫 국공합작의 산물인 데다 수많은 애국 군인과 혁명가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황푸군관학교 '영욕의 세월'을 되돌아본다.
◇근대식 사관학교, '혁명'을 길러내다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신해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혁명자금을 모으고 있었던 쑨원(孫文)은 귀국해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올랐다. 청나라 조정은 북양군벌의 지도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중국민국을 진압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북양군의 강한 군사력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던 쑨원은 '황제 퇴진'을 전제로 중화민국 대총통 직을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청나라는 무너졌지만 위안스카이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했다.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쑨원은 자체 군사력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근대식 사관학교 설립을 마음 먹었으나 자금과 노하우가 없었다. 미국 영국 독일 등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제국주의 열강들은 꺼려했다. 소련만이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 학교 설립 및 운영 자금, 소총과 탄환, 군사 고문 등을 보내주었다.
학교는 광저우(廣州)를 가로질러 흐르는 주장(珠江) 하류의 섬 창저우다오(長洲島) 북쪽 강변지역 '황푸'에 짓기로 했다. 섬이라 땅 값이 쌌고 외부와의 격리도 가능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어 1기생 모집에 나섰다. 추천장을 받은 30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고 그 중 470명을 선발했다.
제1차 국공합작 직후였던 1924년 6월 16일 국민당과 공산당, 지방군벌들까지 연합한 군사학교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였지만 지역 이름을 따서 '황푸군관학교'라고 불렀다.
초대 교장은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정치부 주임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친화력이 남다르고, 뛰어난 선동가였던 저우언라이는 생도들을 공산당으로 대거 끌어 모았다. 장제스가 총애하던 생도들이 많이 포섭됐다. 장제스는 골머리를 앓았다.
그 중에는 천껑도 있었다. 1기생 천껑은 장제스의 목숨을 구했던 제자였다. 장제스는 생도들을 이끌고 지방군벌과 전투를 벌이다가 포위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천껑이 장제스를 등에 업고 포위망을 뚫었다. 수일을 헤매다가 아군을 만나면서 장제스는 생환했다. 중국 속담에 "은혜와 원수는 대를 이어 갚는다"는 말이 있다. 장제스는 생명의 은인 천껑을 매우 아꼈다.
그런데 어느날 천껑이 공산당원이 됐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교장 장제스는 천껑을 불러 사실 여부를 물어봤다. 천껑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장제스는 타일렀다. "저우언라이 따라가면 자네 인생은 가시밭길이네.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나. 내 곁에 있으면 꽃길을 걸을 수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 마음을 돌리길 바라네." 천껑은 정중히 거부했다.
장제스는 4기생 린뱌오(林彪)도 "최고의 인재"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린뱌오 역시 그의 곁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 1955년 9월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인민해방군 계급장 수여식이 열렸다. 군에 계급 제도가 도입된 것이다. 린뱌오는 원수, 천껑은 대장 계급을 달았다. 대만의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듣고 흐뭇했다. "역시 내 눈은 정확했어. 그놈들, 공산당 들어가서 한 자리 할 줄 알았지."
◇피끓는 韓·中 '별'들의 요람
황푸군관학교는 6년 동안 1~7기생 8800여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황푸 생도들은 파가 갈려 걸핏하면 서로 패싸움을 벌였지만 지방군벌과 전투를 벌일 때는 한마음 한뜻으로 전우애를 발휘했다. 특히 북벌(北伐)전쟁에서 탁월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공산당의 군 간부가 됐다. 이들을 '황푸계(系)'라고 부른다.
국민당에선 특무조직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을 이끌었던 다이리(戴笠), '시베이왕(西北王)'이라 불렸던 후쭝난(胡宗南) 등이 대표적이다. 공산당에선 린뱌오, 쉬샹첸(徐向前), 천껑, 쑹스룬(宋時輪), 류즈단(劉志丹) 등을 꼽을 수 있다. 예젠잉(葉劍英)도 교수부 부주임을 지낸 바 있다.
또한 황푸군관학교는 조선 청년들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이기도 했다. 황푸군관학교를 거쳐간 조선인들은 확인된 인원만 73명에 달한다. 우한(武漢) 분교를 비롯한 여러 분교에 재학한 청년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200명이 넘는다. 대표적 인물로 김원봉, 김성숙, 오성륜, 김산, 이규학, 장철부 등이다. 윈난(雲南)육군강무당(군관학교)을 마친 평안도 출신 최용건은 이 곳에서 교관을 지냈다.
황푸군관학교는 장제스의 우경화로 1927년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장제스는 공산당 성향의 학생들을 체포·처형하거나 퇴교시킨 후 수용소로 보냈다. 장제스가 1930년 난징(南京)에 독일 고문단을 영입해 새로운 중앙정치군사학교를 설립하면서 황푸군관학교는 문을 닫았다. 대만은 육군사관학교의 뿌리를 황푸군관학교로 간주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우리가 황푸의 후예", 양안의 정통성 경쟁
중국과 대만은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황푸군관학교 창립 100주년'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시진핑 (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7일 베이징에서 열린 황푸군관학교 창립 100주년 및 동창회 설립 4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에 보낸 축전에서 황푸군관학교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대만 독립에 반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피력했다. 시 주석은 "앞으로도 '애국과 혁명'이라는 '황푸 정신'을 계속 계승해 대만 독립을 단호히 반대하고 통일을 추진함으로써 중국몽(中國夢)을 함께 실현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라이칭더(賴淸德) 대만 총통은 가오슝(高雄) 펑산(鳳山) 소재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중국이 대만을 병탄하고 소멸시키는 것을 민족적 대업이자 위대한 부흥으로 여기고 있다"며 사관생도들에게 "희생, 단결, 책임이란 황푸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헌신해 달라"고 당부했다. 양안의 정통성 경쟁이 흥미롭다. 이는 황푸군관학교가 '중국 혁명의 성지'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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