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알고보니 이순신 장군도 삼국지 골수 마니아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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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순신 장군이 꼽혔다는 한국갤럽 조사가 최근 나왔습니다. 그 다음은 세종대왕, 박정희, 노무현, 김구·김대중(공동 5위) 순이라고 합니다.
문득 여기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이 무엇인지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도 ‘삼국지’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사(正史) 삼국지가 아니라 소설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겠죠. 이 책에 나오는 많은 고사성어, 그러니까 도원결의(桃園結義), 단기천리(單騎千里), 삼고초려(三顧草廬), 고육지책(苦肉之策), 칠종칠금(七縱七擒), 읍참마속(泣斬馬謖) 같은 말들은 지금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종종 아무 설명 없이 쓰고 있습니다. 전 국민이 이미 삼국지를 읽은 것으로 상정하는 것 같아 재미있기도 합니다.
며칠 전 대학로에서 ‘증발’해 버렸다는 신윤복 그림도 삼국지연의의 칠종칠금을 소재로 그린 것이었습니다.
삼국지, 즉 삼국지연의는 우리나라에 언제 들어와 ‘한국인의 고전’이 됐던 걸까요. 삼국지연의는 14세기 중국에서 쓰여졌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엔 1569년 선조가 ‘장비의 고함 소리에 만군이 달아난다’고 하자 기대승이 ‘읽어본 적은 없지만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허망한 책이라고 들었다’며 면박을 줬다는 대목이 있습니다.(이 대목을 자세히 읽어보면 기대승은 흥분해서 말을 하던 도중 앞서 말과 다르게 자신도 사실은 그 책을 읽었다는 것을 실토합니다) 이에 따라 학계에선 16세기 중반쯤엔 삼국지연의가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근 500년 동안 읽힌 책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도 그 당시 삼국지연의를 읽었던 걸까요. 종래 삼국지의 제갈량과 이순신을 비교한 시도가 국내에서 있었습니다. 시호가 충무(忠武)라는 공통점을 가진 두 인물을 비교하는 것이죠. 노산 이은상 같은 이는 ‘제갈량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지만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구하지 않았느냐’며 이순신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글 뒤에 다시 나오지만 실제로 이순신은 (겸양하는 말이었지만) 자신이 제갈량보다는 못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의 일부 문장이 ‘난중일기’에 그대로 나온다는 사실이 최근에서야 밝혀졌습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의 난중일기 기록 중에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①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
(외무광부지주석, 내무결책지동량)
밖에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에는 계책을 세울 기둥 같은 인재가 없다.
그리고 또 이런 문장도 나옵니다.
②增益舟船, 繕治器械, 令彼不得安, 我取其逸
(증익주선, 선치기계, 영피부득안, 아취기일)
배를 더욱 늘리고 무기를 만들어 적들을 불안하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 편안함을 취하리라.
그런데 이 문장들은 모두 삼국지연의 22회 ‘조조가 군대를 나눠 원소에게 맞서다’에 나오는 문장과 같다는 것입니다. ①은 유비가 조조에게 대항하기 위해 원소의 도움을 요청할 때 학자 정현(鄭玄)이 써 준 추천서에 나오는 문장이며, ②는 원소가 유비를 도우려 하자 모사 전풍(田豊)이 간언한 말입니다. 모두 ‘후한서’ 등의 정사(正史)에 비슷한 문장이 나오지만, 난중일기는 유독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표현과 똑같이 썼다는 것입니다.(노승석 ‘이순신의 승리전략’)
이 시기는 1594년 9월 장문포 해전 직후 일본군과의 해전이 소강 상태에 들어간 시기에, 충무공이 인재를 모으고 배와 무기를 늘리는 등 다시 닥칠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삼국지연의가 이순신의 전략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세기 학자 성대중(成大中)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에도 관련 기록이 있습니다. 전쟁이 나자 이순신의 친구 한 사람이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며 삼국지연의를 보냈고, ‘충무공은 이 책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公之得力於此者爲多)’는 것입니다. 청성잡기는 2006년에야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 의해 번역됐습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1598년 이런 일도 있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명나라 수군 도독인 진린이 어느 날 천문을 봤더니 장군성이 흔들렸고, 이순신에게 ‘크게 다치거나 전사할 조짐’이라며 제갈무후(제갈량)의 고사를 들어 하늘에 기도할 것을 권유했는데, 이순신은 “제 능력과 업적이 무후만 못할진대 어찌 감히 무후처럼 기도를 올리겠습니까’라며 정중히 사양해서 진린이 이순신의 인품에 크게 감화됐다고 합니다. 이것은 (1)삼국지(연의)를 읽은 사람이, (2)삼국지를 읽은 사람에게, (3)상대방이 당연히 삼국지를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대화가 이따금 이뤄진다는 걸 보면 흥미롭습니다.
칭송하는 사람도 많지만 일각에선 ‘무협지’ 정도로 폄훼(진중권)하기도 하는 삼국지연의는,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훨씬 귀중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무위키 삼국지연의 항목에는 아래와 같은 글도 인용돼 있는데, 해당 글을 쓴 사람은 그건 삼국지연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아니라 현대 중국 작가의 지나친 미화에 대한 반론일 뿐이었다는 변명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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