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224] 너무 잘 나타나도 문제
‘사흘’을 ‘4일’로 알고 ‘금일(今日)’은 ‘금요일’로 여긴다더니. 요즘 청소년들 어휘력이 그냥 웃어넘길 지경을 넘어선 모양이다. ‘충분히 사례하겠다’ 하니 ‘예시를 들어 설명하겠다’는 뜻이냐고, ‘사생 대회’는 ‘죽기 살기 대회’냐 묻는다지 않는가.
당장 한숨이 나오지만, 언론이 진정 그럴 형편이 될까. ‘지금 바로’를 뜻하는 ‘금세’를 ‘금새’로, ‘웬일’ ‘웬만하다’를 ‘왠일’ ‘왠만하다’로, ‘오랜만’은 ‘오랫만’으로 심심찮게 잘못 쓰는 판이니. 저 안타까운 세태에 얼마큼 책임이 있지 싶어 안 되겠다. 눈길을 좀 덜 멋쩍은 쪽으로 돌려보자.
‘고교 2학년생 2명 중 1명은 보통 학력 기준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고생 학업(국어) 성취도를 평가해 보니 그랬다는데. ‘것으로 나타났다’는 문구가 지나치게 나타나서 거추장스럽다. 그냥 ‘보통 학력 기준에 못 미친다’ 하면 되니까. ‘미혼 남성이 미혼 여성보다 20%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도 마찬가지. ‘20%가량 많다’ 하면 그만이다.
이런 표현은 어떤 기관이나 단체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도할 때 흔히 나타난다. 위에 든 보기도 교육부-교육과정평가원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내용을 옮긴 것. ‘나타났다’를 쓰지 않으면 언론 스스로 조사한 듯이 보일까 봐? ‘~에 따르면’ 하고 조사 주체를 기사에 꼭 밝히므로 그럴 필요가 없건만. 설마, 단정(斷定)하는 느낌을 줄여 오보가 돼도 책임을 덜려는 무의식적 관행일까.
정히 그렇다면 ‘보통 학력 기준에 못 미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20%가량 많음이 드러났다’식으로 판에 박힌 문구를 벗어날 수도 있다. 좀 간결하지는 못하지만.
‘사례(謝禮)’에서 ‘사례(事例)’를 떠올리고 ‘사생(寫生)’은 ‘사생(死生)’으로 유추하기라도 하니 그나마 희망이 있다 할까. 학교 교육이 허물어진 시대…. ‘희한(稀罕)’을 ‘희안’으로, ‘이역(異域)만리’를 ‘이억만리’로 쓰지 않도록 대중매체라도 분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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