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이 비참함의 진부함 앞에서
약자 여성들이 겪는 폭력 여전
女작가들의 소설과 강연 접하니
생존의 불안·글쓰기 고통 느껴져
지금 이 순간에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장기화되는 우크라이나 전쟁도 팔레스타인 전쟁도 당사국이 아닌 나라에서는 강 건너 불 보듯 조금씩 잊혀간다. 237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고 있던 가자지구는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양쪽의 사상자들도 연일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스라엘군은 전사자 수가 300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지만, 이스라엘의 폭격과 지상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간인은 3만7000명이 훨씬 넘는다. 난민수용소가 폭격을 당하고 학교가 문을 닫아서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심각한 고통과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작가의 소설 ‘사소한 일’은 죽음의 위험이 일상화된 팔레스타인의 현실과 사회적 약자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공포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2000년대 웨스트뱅크의 팔레스타인 A구역에 살고 있는 한 여성이 과거에 한 사건이 일어났던 역사적 현장을 찾아나서며 은폐된 진실을 대면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사건은 1948년 ‘나크바(재앙)’라고 부르는 이스라엘의 침략이 있은 지 1년 후인 1949년 8월9일부터 13일까지 일어났다.
소설 전체를 불길하게 뒤덮고 있는 모래와 먼지, 총성과 포화, 검문소와 장벽, 개 짖는 소리와 휘발유 냄새 등의 감각지표들은 강렬한 이미지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낸다. 사건 현장에서 군인들에게 오인된 행동으로 인해 영문도 모른 채 총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르면 1부의 ‘소녀’와 2부의 ‘나’는 고스란히 겹쳐진다. 민족적, 인종적, 젠더적 약자로서 ‘팔레스타인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이 ‘사소한 일’이라는 반어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희생된 누구의 죽음도 결코 ‘사소한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난가을 DMZ평화문학축전에서 아다니아 쉬블리의 강연을 들었다. 아다니아의 발표문 ‘다시, 쓰기 위하여’는 2014년 7월 라말라에서의 기억과 12월 베를린에서의 기억을 교차하면서 생존의 불안과 글쓰기의 고통을 들려준다. 이 글에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병치되면서, 갑작스러운 폭격 경고에 아이들을 데리고 서둘러 집을 떠나는 엄마와, 객차에서 아이에게 빵조각을 먹이는 가난한 엄마가 등장한다. ‘모성’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절박함이나 두려움, 분노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방위군의 계획된 공격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눈은 그들이 보는 것에 의해 포로가 되고, 몸은 국경을 넘을 수 없는 경계가 되며, 혀는 말문이 막히게” 된다.
아다니아 쉬블리는 “이 비참함의 진부함 앞에서, 글쓰기의 소명은, 다시 한번, 가로등을 켜는 사람의 것과 같다”고 썼다. 부단히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다시 한번’이라는 부사어에 깃든 절망과 희망, 불가능성과 가능성을 떠올려본다. 고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베를린에 살면서 작가는 글 쓰는 행위를 둘러싼 고립과 괴리를 수없이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다니아의 이러한 위치성이 팔레스타인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피해자 서사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지점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그녀는 지금도 지구촌 어디에선가 “다시 한번, 가로등을 켜는 마음으로” 펜을 들었을 것이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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