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뉴욕의 ‘한인들을 위한 부엌’ H마트, 미국인 식문화 바꿨다
美서 유통업 성공… 한국 농산물 조달
상주곶감-해남배추 美 수출길 열어
창업 42년만에 북미 매장 100여 곳… “美 식품시장 개조” K푸드 영역 확장
《“‘꿀밤’은 무슨 맛이지?” “소바면은 어떤 게 좋을까?”
18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어퍼웨스트사이드 중상층 주택가의 한국 식료품점 H마트. 중학생 또래 소녀들은 깐 밤이 든 한국 간식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백인 여성은 소바 재료를 찾느라 진열대를 기웃거렸다. 한국 라면과 연어, 마늘 등을 구입한 60대 주민 댄 씨는 “이달 초 H마트가 생긴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며 “싱싱한 채소, 생선과 한국 일본 먹을거리를 찾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H마트는 1982년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몰려들던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서 ‘한아름마트’라는 이름의 한인 식료품점으로 출발했다. 창업 42년 만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100여 곳의 매장을 보유한 아시아계 최대 독립 마트로 성장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아시아계 식료품점이 미국인의 식습관과 식료품 시장을 개조하고 있다”며 H마트를 주목했다. 뉴욕 변두리 한인 마트를 미국에서 가장 핫한 마트로 키운 주역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 덕신리 출신 권씨 3형제다. 언론 노출을 꺼리는 3형제를 잘 아는 미국과 한국의 지인들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 “우리 상품 통해 모국 자부심 느끼게 하고 싶어”
셋째인 권일연 회장(69)은 H마트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권 회장이 3만 달러를 밑천으로 우드사이드에 가게를 열었던 1980년대는 한 해 2만, 3만 명의 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던 ‘대이민의 시대’였다. 한인 마트는 낯선 타국에서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한국계 이민자들을 위한 ‘부엌’ 역할을 했다. 권 회장은 마트 이름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한아름’으로 지었다.
H마트 역사는 미주 한인사회 성장의 축소판이다. 이민 1세대는 과일가게, 식료품점, 세탁소, 주류점, 꽃집 등의 장사를 했지만 2, 3세대는 주류사회에서 변호사, 의사, 공무원 등 전문직으로 활약하고 있다. H마트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260만 한인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아시아계와 주류 시장으로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권 회장은 2002년 19번째 매장을 열며 한국식 발음인 한아름마트를 현지인들도 쉽게 기억하는 ‘H마트’로 바꿨다. 미국 주류 마트처럼 깔끔하면서 가격은 저렴하다는 입소문이 나자 고객층이 한인에서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계 이민자들로 확장됐다. 최근 유학생과 이민자가 많은 대학가와 한인타운 밖으로 나와 중상층 주택가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고객 3명 중 1명은 비아시아계다.
“우리의 훌륭한 상품으로 동료 한인들이 모국 대한민국의 장대한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권일연 회장은 “우리의 식품은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강조한다. H마트의 홈페이지 인사말과 사명을 통해 “뛰어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뉴욕의 풀턴 수산시장에서 생선을 직접 가져오거나 재배 농부와 농산물을 직거래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H마트는 대만계 99랜치마켓, 일본계 미쓰와, 인도계 파텔브러더스 등 다른 아시아계 식료품과 경쟁하며 신선한 생선과 채소, 잘 정리된 상품, 깨끗한 매장으로 차별화했다. 권 회장의 전 부인이자 H마트 점포 디자인을 맡아 온 엘리자베스 권(주정아) 씨는 NYT에 “아시아 식료품점이 지저분하고 낡았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매장을 깨끗하고 현대적이며 물건을 찾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 중동 건설 현장에서 쌓은 노하우로 뉴욕서 도전
권 씨 형제의 ‘아메리칸 드림’은 1970년대 중동에서 시작됐다. 현대건설 동아건설이 중동에서 항만 등 건설 사업을 수주하며 ‘중동 붐’이 일던 때였다. 당시 10만여 명의 한국인 근로자가 중동에서 땀을 흘렸다. 권중천 회장은 중동에 한국 식음료를 공급하며 식품 유통업에 눈을 떴다. 올해 1월 부산수산정책포럼은 권 회장에게 ‘제9회 수산대상’을 수여하며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의 교민에게 식자재를 공급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난 38년간 20개국에 수산물 1000여 종을 수출했다”고 공적으로 설명했다.
둘째인 권중갑 스탠포드호텔그룹 회장(76)도 사우디에서 종잣돈을 모아 뉴욕에서 식료품점, 호텔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셋째 권 회장 역시 동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동 붐이 불던 1978년 사우디에서 일하다가 1980년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고 했다.
언론 노출을 기피하는 권 씨 형제들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모국과 고향을 위한 일을 할 때다. 2020년 맏형인 권중천 회장은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뜻을 모으자”고 두 동생에게 제안해 2억 원의 성금을 한국에 기부했다. 권 회장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고액기부자 클럽인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셋째 권일연 회장에 대해 “고향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과 행동은 세계 1등”이라며 “안동소주를 H마트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진열해 준 덕분에 유명해졌다”라고 말했다.
● ‘메이드 인 아메리카 한류’, K푸드 도전 시험대
미국 최대의 아시아계 식품점 체인으로 성장한 H마트는 미국과 한국을 잇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현지인들도 한국 드라마에서 본 음식을 만들고 싶다거나 김치를 담가 보고 싶다며 H마트를 찾는다. 한인 2, 3세들에겐 한국 문화를 이어 가는 장소다. 한국계 미국인인 조이스 정 씨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지만 두 아들의 도시락에 김밥을 싸주고 떡볶이를 함께 한다. 정 씨는 “언어보다 강한 게 음식 같다. H마트는 한인 2, 3세들에게 부모님 나라와의 연결 고리”라고 말했다. 2021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한 베스트셀러 ‘H마트에서 울다’를 쓴 한국계 미국 인디 팝밴드 가수인 미셸 자우너에게 H마트는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리는 “신성한 공간”이다.
H마트는 한인 사회와 함께 성장하고 있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는 “권일연 회장은 1980년대 사업 초기부터 덩치가 커졌다고 다른 한인의 사업을 흡수하지 않았다. 대신 구매력을 키워 한인업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사업을 키웠다”고 말했다. 권회장은 뉴욕 한인들의 정치력을 결집하려는 한인유권자운동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전 세계 음식 문화가 흘러 들어오는 미국 뉴욕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등을 테마로 식자재 마트와 음식점이 한 공간에 들어선 ‘푸드홀’이 있다. ‘미국에서 만든 한국 전통(Korean tradition made in America)’을 강조하는 H마트 역시 상품을 판매하는 마트에서 한국 먹거리와 음식 문화를 전파하는 ‘K푸드 허브’가 되고 있다. 올해 5월 롱아일랜드시티에 문을 연 H마트 매장에는 김가네, 라이스보이, 오케이도그 등 한국 음식점이 입점했다.
미국에서 동네 한인마트의 한계를 뛰어넘은 H마트도 미주 한인 사회의 걱정인 ‘민족성 소멸’과 정체성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새로 유입되는 이민자가 줄고 이민 1세대가 퇴장하면 미국 일본 커뮤니티처럼 민족적 정체성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김동석 대표는 “중국 대만 일본 인도 등 아시아 상품과 고객층이 다양해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동시에 한국 식품점 정체성이 약해지는 문제를 H마트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H마트는 |
1982년 뉴욕 퀸스 우드사이드에 ‘한아름마트’(사진)로 오픈 1987년 뉴욕 맨해튼 코리아타운점 오픈 1990년대 뉴저지 및 펜실베이니아주로 매장 확대 2000년대 버지니아, 메릴랜드, 조지아, 텍사스주 진출. H마트로 사명 변경 2021년 NYT ‘H마트의 유혹, 아시아만큼이나 넓은 진열대’ 전면 기사 2024년 뉴저지주 아메리칸드림몰에 대규모 푸드코트 오픈 예정. NYT “H마트는 문화현상” 재조명 |
박용 부국장 parky@donga.com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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