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의 한뼘 양생]몸의 일기를 쓴다
얼마 전 후배가 74세의 딩크족 노부부에 대한 다큐 한 편을 소개했다. 핵심은 ‘느림’이었다. 70대가 되면 ‘후다닥’ 밥을 차리는 게 불가능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노년 코하우징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나에게 후배는 “그냥 넓은 집에서 친구들과 다 같이 사세요. 70, 80대가 되어서 각자 공간을 갖는 게 의미가 있겠어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 프로젝트에서 비용이나 건축법 못지않게 고민이 된 것은 ‘늙은 몸’에 대한 구체성이었다. 건물 안에 엘리베이터가 필요할까? 몇살까지 운전할 수 있을까? 늙은 몸이 도통 가늠되지 않을 때 나는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를 다시 읽는다.
51세 때는 “날렵한 걸음걸이, 유연한 발목, 견고한 무릎, 탄탄한 장딴지, 튼튼한 엉덩이”를 가진 자기 몸에 우쭐한다. 그러나 딱 1년 후에는 논쟁을 하던 중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극도로 낙담한다. 55세에는 검버섯이 돋았고, 59세에는 스스로 가려운 곳을 정확히 찾아 긁는 데서 희열을 느낀다. 60대에는 어지럼증, 사라진 성적 욕망, 심해진 건망증, 70대에는 이명,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방귀, 전립선비대증, 휴대용 소변 주머니와 더불어 산다. 80대에는 바지 앞 지퍼를 잊고 잠그질 않는 일과 낮잠이 일상이 된다.
이 소설의 시작점. 보이스카우트에 참가한 열세 살 주인공은 친구들 장난으로 나무에 묶여 숲에 버려졌고 겁에 질려 똥을 쌌다. 극도의 수치심 속에서 주인공은 결심한다, 두려움에 지지 않기 위해 ‘몸의 일기’를 쓰겠다고. 몸이 무엇을 할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몸의 모든 것에 대해 기록한다면, 몸에 휘둘리는 일은 없지 않을까?
열일곱이 되어서도 주인공의 생각은 변함없다. 아직도 몸 속속들이 익숙하지 않았고, 발전된 의학이 자기 몸에 대한 낯선 느낌을 없애주진 못했기 때문에 “루소가 산책길에 식물채집을 했던 것처럼” 자기 몸을 관찰하고 채집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열셋부터 여든여덟까지 몸이 벌이는 사건, 몸이 보내오는 온갖 신호를 기록한다.
알다시피 몸은 인식의 근거이고 권력관계의 현장이다. 따라서 두려운 몸, 뻐기는 몸, 유능한 몸, 늙고 병난 몸, 심지어 잊힌 몸까지 오로지 몸이 겪는 몸의 생애사를 기록한 이 소설은, 다른 한편으로는 훌륭한 정치적 에세이이자 인류학적 자기 관찰지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것이 남성 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세상은 온통 건강과 ‘피지컬’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여성의 몸, 늙은 몸, 장애인의 몸, 성소수자의 몸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나치게 적게 말한다. 세상 n개의 몸에 대한 디테일에 우리는 무지하다.
나도 몸에 대해 생각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때 음식을 씹지 않고 물고 있었고, 청소년기에 첫 생리와 더불어 관능적 쾌락에 눈을 떴고, 청년 시절 고문으로 온몸이 단풍나무처럼 변한 적도 있지만, 그 어느 때도 몸이 탐구 주제였던 적은 없다. 나는 언제나 몸이 아니라 정신, 이념, 의지가 나인 것처럼 살았다. 하지만 틀렸다. 몸이 나에게 협조하지 않는 순간이 벼락처럼 온 후 나는 비로소 몸이 나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몸의 일기를 쓴다.
시네필을 자처하는 내가 영화관에서 까무룩 졸았을 때의 당혹감, 여권 사진에 포토샵은 필요 없다고 ‘보디 포지티브’를 흉내 내지만 깊어져가는 M자 탈모 앞에서의 속수무책 두려움, 임플란트라는 이물질에 적응하는 고통,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아이고’라는 곡소리를 나는 쓴다. 나는 매일매일 내 몸과 경합하고 복종하고 분노하고 화해한다. 나는 내 몸과 분투 중이다.
<몸의 일기> 주인공은 일기를 딸에게 남겼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그것을 내가 몸을 끌고 가는 것도 아니고, 몸이 나를 끌고 가게 하는 것도 아닌, 그 어딘가의 균형점을 찾기 위해 쓴다. 저자의 말처럼 “흐릿함에서 벗어나기, 몸과 정신을 같은 축에 유지하기” 위해 나는 쓴다. 자기 배려의 기술로서 몸의 일기. 아직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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