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할매 열전]삐뚤이 할매

기자 2024. 6. 2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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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여행기 청탁 때문에 고흥에 갔다. 늦가을인데도 들풀은 새파랬고, 햇볕이 따가웠다. 녹동이란 표지판을 보고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삐뚤이 할매. 입이 홱 돌아갔다고 삐뚤이 할매였다. 젊어서는 구례서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할매는 이미 삐뚤이인 데다 늙어 미(美)를 떠올릴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입 돌아간 할매였을 뿐.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 내가 삐뚤이 할매를 잊지 못한 것은 언젠가 누구에겐가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할매는 꿈에도 기다리던 아들을 낳고 입이 돌아갔다. 입만 돌아간 게 아니다. 눈썹과 머리가 다 빠지고 살이 짓물렀단다. 다들 문둥병이라고 했다. 문둥이가 흔하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야멸차게 갓난아이를 떼내고 할매를 쫓아냈다. 할매가 갈 곳은, 아니 할매를 받아줄 곳은 소록도뿐이었다. 고속도로도 없고 버스도 흔치 않던 시절, 할매는 병든 몸으로 걷고 또 걸어 소록도로 갔다. 문둥병인 줄 알았으니 사람의 눈을 피해 걸었을 게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문둥이 시인 한하운처럼.

남편도 이웃도 다 문둥병이랬는데 정작 소록도에서는 문둥병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살이 다 문드러진 채 아이들 옆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문둥병 같은 행색의 할매에게 아무도 일을 주지 않았다. 소록도가 바라보이는 녹동항 인근에서 빌어먹으며 할매는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어느 날, 엎드려 손을 내밀고 있는 할매의 등짝을 누군가 야무지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사지육신 멀쩡한 년이 먼 낯짝으로 동냥질이여!”

어느샌가 머리카락이 새로 나고 곪아 터졌던 상처에 새살이 돋은 것을 할매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이 비뚤어지고 한쪽 얼굴이 내려앉긴 했지만 누가 봐도 문둥이 행색은 아니었다. 등짝 내려친 녹동 할매에게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몇푼의 돈을 꾼 할매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어미 없이 벌써 종알종알 새살을 늘어놓을 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겠지.

대문을 들어서자 낯선 여자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더란다. 돌쟁이쯤의 아이를 들쳐업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남편은 할매를 내쫓은 직후 새 여자를 들인 것이다. 아내가 죽거나 아프면 가차 없이 아이들 돌봐줄 새 여자를 들이던 시대였다. 그것만 해도 억장이 무너지는데 여자 옆에서 서너 살 된 사내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입이 비뚤어지고 한쪽 얼굴이 내려앉은 할매를 본 아이는 소스라쳐 울음을 터뜨렸다. 젖 물리다 말고 빼앗긴 할매의 아이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할매는 털썩 주저앉아 손바닥으로 땅을 내리치며 꺼이꺼이, 섧게 울었다.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잊었는데, 그날따라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 가을 강처럼 시퍼랬다는 말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뒤로 나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만 보면 녹동을 생각하곤 했다. 나에게 녹동은 유년의 내가 가닿지 못한 삶의 비의(悲意)를 품은 곳이었다. 집에서도 소록도에서도 쫓겨나 바닷가의 세찬 바람을 맞으며, 자신보다 별반 나을 것도 없는 가난한 어촌 사람들에게 동냥질을 하며 살던 그 시절, 할매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집으로 돌아온 할매는 온 세상이 제 새끼 노리는 위험한 매이기나 한 듯 제 자식 품에 꿰찬 독한 암탉이 되었다. 할매가 장에 나타나면 장사꾼들은 속으로 욕을 하며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딴짓을 했다. 참외가 천 원에 네 개라치면 말도 없이 천 원만 건네고는 대여섯 개를 마구 주워 담기 때문이었다. 어지간히 대찬 장사꾼이라도 할매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여자가 저리 독하니 영감이 더 못난 첩실만 끼고도는 거라고, 사람들은 뒷전에서 들으란 듯 숙덕거렸다.

실제로 할매의 남편은 노상 첩 집에서 살았다. 바로 길 건넛집이었는데 언젠가 대문 앞에서 그 집을 노려보는 할매를 본 적이 있다. 저녁 무렵이었다. 첩 집 담 너머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다정한 것이 분명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인사를 건넸는데 나를 휙 돌아본 할매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나를 알아본 순간 이내 그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잃은 여자는 독해진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할매 닮아 똑똑하고 인물 좋은 자식들은 다 성공해서 서울 산다. 첩 자식들보다 훨씬 잘됐다. 눈을 감을 때 할매는 그래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다시는 빼앗아오지 못한 남편의 사랑이 더욱 사무쳤을까?

정지아 소설가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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