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무릇 지도자란 행동하는 사람이거늘

이남석 발행인 2024. 6. 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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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71 
왜적 공격에 흩어져 도망친 군사들
살려달라 애걸한 明의 부총병 양원
몸 돌보지 않은 채 현장 누빈 순신
12척의 함선 수습해 어란포로 이동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은 몸을 돌보지 않은 채 현장을 누볐다. 잃어버렸던 판옥선을 되찾고, 전장을 점검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 몸이 버텨나질 않았지만, 이순신은 혼수상태에서 기력을 회복한 다음날에도 현장을 찾았다. 자고로 이런 게 지도자의 자세다. 지도자란 자가 맡은 직職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 행동하는 자리다.

지도자가 맡은 직은 절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남원이 초토화되던 1597년 8월 16일, 모리휘원·가등청정·흑전장정 등이 이끄는 왜적 우군 6만4000명이 경상남도 안음현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적은 이미 창녕, 의령 등 경상도 전역을 유린했다. 왜적의 공격을 앞두고 안음현감 곽준郭遵은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가족과 백성들을 산성 안으로 옮겼다.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지원명령을 받은 김해부사 백사림도 관군을 이끌고 오면서 수천명의 관민합동 수비군이 꾸려졌다.

하지만 어느 틈에 백사림이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백사림의 군사들도 흩어져 도망을 쳤다. 나머지 군사와 백성군은 험준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지형을 활용하면서 사흘을 견뎌냈다.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돌을 굴려 산성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막아냈다.

곽준은 적장 가등청정의 항복 권고를 물리치고 끝까지 싸웠다. 결국 자신의 두 아들 곽이상, 곽이후와 함께 적의 칼에 죽었다. 함양군수 역시 최후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곽준의 사위 유문호는 적에게 포로가 됐다.

이때 유문호의 아내이자 곽준의 딸 곽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가 죽지 아니한 것은 남편이 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조차 잡혀가니 내 어찌 살랴"라며 목을 매어 죽었다. 황석산성은 왜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나서야 8월 18일 함락됐다. 왜적은 여기서도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원성에서 도망간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무리는 전주성으로 이동하다 가등청정의 부대를 만나 거의 몰살을 당했고, 일부는 포로로 잡혔다. 포로가 된 양원은 남원에서 강탈한 물건들을 왜군 병졸 앞에 내어 놓으며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이때 왜군 장수 한명이 "저놈은 장수이지만 자격이 없는 놈이니 살려 보내라. 우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리게 할 필요도 있다"며 풀어줄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는 발길로 양원의 등덜미를 차서 쫓아 버렸다.

왜군이 몰려오자 많은 지방직 관료들이 도망을 쳤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목숨을 굴욕적으로 보존한 양원은 나머지 군사 17명을 데리고 전주로 도망쳤다. 그러고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군사를 잃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하지만 남원성에서 혼자 살아 돌아온 조선의 군관 김효의 때문에 탄로가 나고 말았다. 이후 양원은 북경北京에서 사형을 당했다. 명나라는 사죄의 의미를 담아 그의 수급을 조선 조정에 전달했다.

남원성을 공략한 왜적 좌군과 황석산성을 돌파한 우군이 일제히 전주성을 향해 진군하자 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과 전주부윤 박경신은 8월 19일 방어를 포기하고 도망쳤다. 결국 왜군 11만명이 전라북도의 전주성에 줄지어 무혈 입성했다.

전주성이 함락되던 8월 19일, 전라남도 장흥군의 회령포에서는 12척의 조선 함선들과 여러 장수가 집결한 가운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이 열렸다. 판옥선 12척 중 10척은 경상우수사 배설에게 회수한 것이었다. 나머지 2척은 칠천량 전투 이후 표류하던 함선으로, 이를 여러 군관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수거해왔다. 다만, 12척 가운데 8척이 배설에 의해 회령포에 숨겨진 것이고, 나머지 4척은 군관들과 백성들이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 끌어온 판옥선이라는 기록도 있다.

어찌 됐든, 이순신은 배설에게 함선을 수습할 때 상당히 애를 먹었다. 원래는 8월 17일 장흥군의 군영 구미(안양면 해창리)에서 인수받을 예정이었으나, 배설은 이 약속을 어겼다. 그래서 다음날 이순신이 직접 회령포로 찾아가 판옥선들을 회수했는데, 이때 배설은 뱃멀미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지 15일 만에 그를 뒤따르던 장수들과 함께 모여 임금의 교서에 숙배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런데 배설은 순순히 숙배하지 않아 이순신을 경악하게 했다. 통제사는 자신의 뒷배를 믿고 건방진 모습을 보인 배설을 당장에 처벌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마당에 문제를 크게 확대시킬 생각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배설의 영리(전라우수영 서리)에게 장형을 집행했다.

다음날인 20일, 이순신은 12척의 함대를 이끌고 포구가 좁은 회령포에서 벗어나 이진진성 인근인 창사로 옮겨 진을 쳤다. 이때부터 이순신은 몸이 불편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21일 새벽에는 토사곽란을 겪었는데, 차가운 바람을 많이 맞아서 그런 것으로 보고 열을 낼 수 있도록 소주를 마셨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오히려 혼수상태가 되고 말았다.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자 견디다 못한 이순신은 23일 함선에서 머무르는 것을 포기하고 육지에 내려 하루를 머물렀다.

몸을 추스른 이순신은 24일 함대를 어란포 앞바다로 이동시키고 바다 위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에도 어란포에서 머물렀는데 어부 2명이 피란민 소유의 소 2마리를 훔쳐가기 위해 "왜적이 쳐들어온다. 왜적이 쳐들어온다"라고 소리를 지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어부들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함선으로 이들을 즉시 함선으로 잡아오도록 했다. 조사 결과 헛소문을 낸 것으로 밝혀지자 이들의 목을 베어 효시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 틈을 타서 어디론가 도망쳤다. 이때쯤, 왜적 수군은 남해 바다를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칠천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한산도를 장악한 데 이어 여수를 분탕질하고, 고흥과 완도를 거쳐 8월 26일에는 어란진 인근의 이진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정탐을 나갔던 임준영에게 이 사실을 보고받은 후 전라우수사로 새로 임명된 이억추의 전입신고를 받았다. 이억추는 1척의 판옥선을 몰고 왔는데, 이 모습을 본 이순신은 놀라서 자빠질 정도였다. 함선에는 격군도, 무기도, 기타 장비도 제대로 갖춘 게 아무것도 없이 몸만 달랑 왔기 때문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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