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걱정할 건, 기업가 정신의 실종”

홍준기 기자 2024. 6. 20.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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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세계은행 선임 부총재 “고금리 현상 1~2년 내 안 끌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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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밋 길(Gill)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선임 부총재).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좋은 뉴스는 3년 연속 둔화했던 글로벌 성장세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도 3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고, 금융 여건도 밝아졌다. 세계 경제는 소프트 랜딩(soft landing·연착륙)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이 지난 11일 내놓은 최신판 세계 경제 전망(Global Economic Prospects) 보고서는 이런 ‘장밋빛 예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세계은행의 이 대표적 보고서 서문 작성자이자 보고서 전체를 총괄한 인더밋 길(Gill)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선임 부총재)는 WEEKLY BIZ와 화상으로 만나 서문과는 사뭇 결이 다른 우려를 꺼냈다. 그는 “‘경제성장률의 둔화’ ‘무역 분절화’ ‘기후변화’라는 세 가지 암초가 여전히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며 “이런 위협은 저소득 국가나 개발도상국 국민의 삶에 더 치명적일 수 있다”고 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세 가지 경제 암초 중에서도 길 이코노미스트와 세계은행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저성장의 만성화’다. 그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부터 코로나 사태 직전(2008~2019년)까지 세계 경제는 2000년대 첫 10년보다는 느리게 성장했다”며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2020년 이후의 경제성장 속도마저 지난 10년에 비해서도 한층 더 느려진 건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에 이어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세계 경제성장의 엔진이 한 번 더 차갑게 식으면 저소득 국가 경제가 빈곤을 탈출할 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길 이코노미스트는 “한국도 저출산·고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젊은 사업가가 줄어들면서 기업가 정신이 위축되는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양진경

인도 출신인 길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은행에서 근무하던 2006년 동료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이란 개념을 고안해 유명해졌다. 중진국 함정이란 경제 발전 초기에는 빠르게 성장하던 국가도 중진국 단계에 성장 동력을 잃어 고소득 국가에 이르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는 2022년 9월부터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겸 선임 부총재를 맡아 세계 경제 전망과 같은 주요 보고서를 총괄한다.

◇“두 번째 추락이 온다”

미국 경제의 빠른 성장은 전 세계 경제에 그나마 위안이다. 미국이 빠르게 성장하며 세계 경제 전체의 ‘수요’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의 높은 기준금리와 이에 따른 달러 강세(나머지 국가 통화의 약세에 따른 고환율)는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길 이코노미스트는 “고금리로 국가 채무 이자 부담이 커지면 개도국이나 저소득 국가에선 의료와 교육에 쓸 돈을 줄이게 되고, 이 때문에 국민 삶의 질이 낮아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단기적으론 세계 경제가 소프트랜딩에 근접했다고 했는데.

“미국 경제의 탄탄한 성장으로 세계 경제가 안정을 찾고 있는 건 맞는다. 우리는 이번 6월 세계 경제 전망에 올해 미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5%로 조정했다. 지난 1월 전망(1.6%)에 비해 1%포인트 가까이 높인 것이다. 반면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주요국의 성장률은 둔화하는 추세다. 선진국 내부에서도 부익부 빈익빈이 일어나는 셈이다. 우리가 더 우려하는 부분은 삶의 질을 빠르게 개선해 나가야 할 가난한 나라 75~90곳의 성장이 둔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장기적으로 세계 경제 둔화는 얼마나 심각할까.

“코로나 팬데믹 이후 경제성장률이 그 이전인 글로벌 금융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 직전(2008~2019년)보다도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2010년대에도 그 이전 10년에 비해 성장률이 낮았다. 200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성장률이 두 번째 추락을 맞이하는 셈이다. 이는 국가별 소득 수준에 관련 없이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다.”

그래픽=김의균

-세계 경제의 부담을 키우는 요인은

“고금리와 그 부산물인 고환율(달러 강세)이 있겠다. 특히 저소득 국가나 개도국에서 고금리·고환율이 부채 이자 상환 부담을 키운다. 국가 채무 이자 부담이 커지면, 교육이나 보건에 투입할 자금이 줄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성장률이 둔화하고, 삶의 질이 하락할 수 있다. 세계 경제의 4분의 1가량을 차지하는 미국의 고금리 현상이 전 세계 자본 시장에 연쇄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월에도 세계은행은 ‘고금리 현상이 1~2년 안에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각국 경제는 고금리 장기화에 대비해야 한다. 고금리 환경에서 경제가 성장하려면 민간 투자를 유치하는 게 중요하다. 기업 활동에 우호적 환경을 만들어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더 쉽게 투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픽=양진경

-유럽중앙은행(ECB)의 이달 초 기준금리 인하는 어떻게 보나.

“유럽의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결정이라고 본다. 유럽 주요국인 독일·프랑스·영국의 성장률이 1% 미만에 머물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 유럽 경제가 잘 굴러가길 기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특히 유럽에서는 물가 상승률이 비교적 빠르게 낮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과 경제성장률 사이에서 바람직한 계산 결과를 도출했다고 평가한다.”

◇개도국의 고통을 가중하는 요소는

미·중 무역 분쟁이 심화하며 글로벌 무역의 부정적 여파도 커진다. 네덜란드 경제정책분석국(CPB) 분석 데이터를 보면, 글로벌 상품 교역은 2022년 11월부터 한 해 전 같은 기간보다 대체로 감소하는 추세다. 지난해 8월과 9월엔 모두 전년 같은 기간 대비 3.4%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주요국의 선거’란 변수도 글로벌 교역 환경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세계은행이 주요국 선거가 집중된 해의 무역 정책 불확실성 지수를 분석한 결과, 올해는 74.5로 2000년(36.3), 2004년(30.6), 2012년(26.2) 등 앞선 ‘선거의 해’보다 높았다. 무역 정책 불확실성 지수는 다리오 칼다라 등 미국 연방준비제도 소속 이코노미스트들이 주요 언론의 무역 정책 관련 기사를 바탕으로 산출하는 지수로, 높을수록 불확실성이 크다는 뜻이다.

-최근엔 ‘무역 분절화’ 우려도 크다.

“예전에 경기 회복기를 맞이했을 땐 무역량이 빠르게 증가했다. 하지만 최근엔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무역 정책의 불확실성은 21세기 들어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자유로운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개도국에 대한 투자도 줄어드는 양상이다.”

그래픽=양진경

-무역 분절화의 충격파는 국가마다 다른가.

“그렇다. 한국이나 인도처럼 글로벌 공급망(GVC)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나라는 무역 분절화 상황이 발생해도 (대체 수입국이나 대체품을 찾기 유리해) 타격을 덜 받는다. 반면 경제 규모가 작은 국가들은 글로벌 공급망 참여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이 때문에 무역 분절화로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수출 품목에 따라서도 지정학적 갈등의 영향이 다르게 나타난다. 서비스나 상품 중에는 자본재(상품 생산에 필요한 시설·장비) 무역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반면 소비재 무역은 상대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다. 서비스를 많이 수출하는 선진국은 타격을 덜 받지만, 소비재가 주요 수출 품목인 개도국 등이 받는 타격이 더 클 수 있다.”

-기후변화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 20년간 선진국과 신흥국들은 기후변화에 잘 대응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후변화의 충격에서 발생하는 손실을 줄여나가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저소득 국가들은 반대로 상황이 나빠졌다. 기후변화의 충격이 왔을 경우, 피해 정도가 20년 전의 두 배 수준으로 커진다고 분석됐다.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이 국가들이 기후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도록 도와야 한다.”

-선진국 탓에 발생한 기후변화가 개도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다는 것인가.

“기후변화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인지 손가락질하기보다는 기후변화를 막아내기 위해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지에 더 집중하는 게 바람직하다. ‘안정적 에너지 수급’과 ‘개도국 도시들의 심각한 대기오염 해소’ 등을 포괄하는 ‘글로벌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자고 설득하는 게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더 많은 국가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유리한 전략이다.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원 확보나 대기오염을 줄일 방안을 함께 논의한다면 신흥국·개도국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다. 대기오염이 매우 심각한 인도 북부 지역에선 당장 지구온난화 때문에 죽는 이보다 대기오염으로 죽는 사람이 많다.”

그래픽=양진경

◇“젊은 인구, 디지털 토대가 인도의 힘”

앞으로 몇 년 안에 인도가 일본과 독일의 국내총생산(GDP)을 넘어서 미국, 중국과 함께 세계 경제 3강 구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아직 미국과 중국 GDP에는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지만,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는 중국과 달리 인도는 견조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인도 경제의 성장세는 어떻게 평가하나.

“인도 경제성장에 지금이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생산 가능 인구의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성장에 유리한 환경이 갖춰졌다. 조만간 생산 가능 인구 비율은 다시 낮아질 수밖에 없다. 인도가 연평균 6~7% 정도의 ‘속도’로 성장할 수 있다고 예상한다. 일단은 낙관적으로 본다는 의미다. 다만 기후변화, 무역 분절화 같은 ‘외부의 역풍’이 인도의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인도는 디지털 분야에 강점을 가진 나라로 꼽힌다.

“한국처럼 투자 여력이 있는 나라들은 디지털 신기술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게 중요하다. 반면 인도는 1인당 GDP가 한국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이런 나라가 한국처럼 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신 인도는 디지털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인도는 아다르(Aadhaar)라는 디지털 아이디(ID)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기반으로 디지털 금융 거래가 활성화하고 있다. 다른 개도국이 디지털 기술 발전을 위한 정책을 마련할 때 인도의 경험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인도의 경제성장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적으로 인도 경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중국 경제가 둔화되고 있고, 인도가 중국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바라보는 경우가 있다. 인도 경제가 앞으로 연 6~7% 정도 성장하는 동안 중국의 성장률은 연 4~5% 수준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경제에서 인도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21세기 초반의 절반 수준에 머무는 건 맞는다. 다만 같은 기간 중국의 GDP도 크게(2022년 기준 2000년의 약 15배) 불어났다. 성장률이 절반이 됐다고 해도 경제성장으로 한 해 증가하는 GDP 규모가 200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훨씬 커졌다는 의미다. 중국은 여전히 세계 경제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기업가 정신 실종을 걱정하라”

-한국 경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한국은 지난 한 세기 가장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한 국가라고 볼 수 있다. 전쟁 이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 정보화·서비스 경제까지 나아갔다. 정말 놀라운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인공지능(AI)을 중심으로 한 신기술 발전을 미국 같은 선진국이 주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첨단 기술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빼놓을 수는 없다. 미국과 중국이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는 가운데 한국과 일본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저출산·고령화 현상에 대한 우려가 크다.

“한국은 선진국에 진입한 이후 저출산·고령화라는 문제를 맞이하게 됐다. 이는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고령화가 시작됐는데 선진국이 아니라고 상상해 보라. 충분히 경제성장을 달성하지 못했는데 저출산·고령화가 시작된 나라들은 한국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이 가장 걱정해야 할 점은 기업가 정신 실종이다. 나처럼 나이가 든 사람이 새로운 도전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 반면 젊은 청년이 많은 나라에선 새로운 비즈니스에 도전하는 사업가가 많이 나올 수 있다. 고령자 비율이 높아지면 기업가 정신이 약해질 수 있다. 보통 저출산·고령화가 진행될 때 노동력 부족을 걱정한다. 하지만 ‘나는 기업가가 될 거야’라고 꿈을 꾸는 사람이 줄어드는 게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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