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조경기술사 1호’에서 ‘조경계 노벨상’까지···정영선 반세기 작업 한눈에[미술관 옆 식물원]
국립현대미술관서 최초로 조경 전시
희원·선유도 공원·예술의전당 등
반세기 동안의 작업 스케치·설계도 최초 공개
자연 그대로 살리는 ‘꾸안꾸’ 미학
한국 자생종과 자연석 그대로 살려
미술관에는 수많은 식물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만난 식물들에게 한 발짝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는 ‘미술관 옆 식물원’ 코너입니다. 그림 속 식물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는 것도 미술을 즐기는 또다른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오래 전 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식물에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마당엔 갓 심어진 나무와 풀들이 아직 어색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낮은 키의 바람꽃이 하얀 꽃을 피워내고 있었고, 미선나무 꽃은 질 때를 맞아 시들어가고 있었다. 정원 곳곳에 자리잡은 고사리들은 새순을 둥글게 말고 줄기를 뻗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주 기초 단계에요. 갈수록 좋아질 겁니다. 계속해서 풍경이 바뀔 거예요.”
조경가 정영선(83)의 말처럼, 두달 반이 지난 후 정원의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고사리는 풍성하게 몸집을 키워 바람결에 연두빛 잎들을 흔들어댔다. 때이른 무더위 속에 나무와 풀들은 꽃 대신 초록 잎들을 무성하게 피워내고 있었지만, 꼬리진달래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작고 하얀 꽃이 드문드문 보였다. 한국 자생식물과 고사리, 자연석이 어우러진 풍경이 산의 오솔길에서 만날 법한 풍경 같기도 하다. 실제 정영선은 “산은 나의 교과서”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엔 돌이 많잖아요. 시골 돌길이나 물가에 가면 어디를 가나 이런 풍경에 이런 나무들이 있어요. 자연을 한 자락 뚝 따와서 여기다 앉인 거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마당 정원은 정영선이 반세기 동안 만들어온 다른 정원과 공원에 비하면 소소하다. 정영선의 조경을 보고 싶다면 선유도 공원,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예술의전당, 호암미술관 희원 등을 찾으면 된다. 알 만한 전국의 공원·정원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를 봐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조경은 종합과학예술
“조경은 환경을 가꾸는 종합과학이예요.” 48살의 정영선이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한다. ‘여성조경기술사 1호’ ‘파워우먼’이란 타이틀을 단 기사를 국립현대미술관 ‘정영선: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 전시장 입구에서 볼 수 있다. 당시 정영선은 조경설계사무소 서안의 대표로서 예술의전당, 아시아 체육공원·선수촌 등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완료한 뒤였다. 정영선은 한국 조경의 개척자였으며, 건축의 부수적 요소로만 여겨졌던 조경을 건축과 비등한 위치로 끌어올렸다.
전시에선 그가 맡은 300여 개 프로젝트 가운데 60여 개의 프로젝트에 관한 자료가 총망라된다. 파스텔·연필·수채화 스케치, 청사진, 설계도면, 사진, 영상, 모형 등 대부분이 최초로 공개되는 자료들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다양성, 아름다움에 놀랄 뿐 아니라 수많은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정영선의 조경에 대한 철학, 국토와 자연에 대한 생각, 생태와 지구환경에 대한 고려까지 읽을 수 있는 전시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조경과 관련된 전시가 열린 것은 처음이다. 정영선은 “우리 분야로 전시를 한다는 것이 황홀한 일이고 기적이다. 그동안 조경은 건축의 뒷전 정도로만 여겨졌다. 선배로서 후학들을 위해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창피와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마다 않고 나섰다”고 말했다.
‘꾸안꾸’의 미학
‘꾸안꾸’(꾸미지 않은 듯한 꾸밈). 정영선 조경의 미학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땅과 자연의 본바탕을 충분히 살핀 후 그곳에서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의 한국 전통적 미학과 맞닿아있다.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의 희원은 정영선 정원 미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전에 국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정영선은 1997년 희원을 통해 한국 전통 정원을 조경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실험을 한다. 자연경관을 끌어들이는 차경(借景)의 원리를 적용하며, 한국의 들과 산에 자생하는 야생화와 수목을 심었다. 복잡한 식재도에는 때죽나무, 산딸나무, 층층나무, 모감주나무 등 친숙한 이름들로 가득하다. 정원 곳곳에는 석탑, 불상, 벅수 등을 툭툭 던지듯 놓았다. 연못 뒤에 펼쳐진 석가산, 정자, 담장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희원은 한국 전통 정원만이 가진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극대화했다.
“(프로젝트를 맡으면) 땅을 여러 번 가봐. 주변 환경이라든가, 그것을 쓰는 사람이라든가 그 두 개에 집중해요. 그다음에 내 생각을 넣는 것이지. 가능한 한 우리 환경에 잘 적응하고, 우리 것의 아름다움 찾아내고 잘 끌어들이고 잘 되새기고 잘 보존하려고 해요. 나는 일종의 연결사라고 보면 되죠.”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에서 정영선은 말한다.
정영선의 조경엔 ‘사람’도 중요한 요소다. 1994년 맡은 아산 서울중앙병원 조경에선 병원 앞마당에 키 높은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작은 숲을 조성했다. 환자와 가족들이 가슴이 무너질 때 한 바탕 울고 갈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숲에선 병원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무성한 나무들이 내뿜는 생명력 속에서 사람들은 잠시 쉬어갈 수 있다.
땅에 쓰는 시
정영선은 어렸을 때 시인이 될 줄 알았다.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박목월 시인이 정영선의 ‘멘토’였다. 정영선이 경북대학교 영문과 대신 서울대학교 농과대에 진학하려 하자 이를 반대하며 단식까지 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 설득한 것도 박목월이다. 정영선은 “오늘의 저를 만들어준 사람이 박목월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그는 서울대학교 신춘문예에 당선되기도 했다. 전시명 ‘이 땅에 숨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도 정영선이 좋아하는 신경림 시에서 착안했다.
전시에선 과학적 지식에 근거한 정밀한 설계도와 함께 정영선이 메모한 시적인 문구도 함께 볼 수 있다. 그가 구상한 풍경이 “깊고 어두운 숲. 아스라한 숲길” “숲의 바다 저너머” “거울 같이 맑은 물” 같은 문구로 표현됐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의 개인 정원인 ‘포항 별서 정원’을 설계할 땐 “벼랑 끝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볼 때 나희덕의 시 ‘여, 라는 말’을 떠올렸고, 이를 이미지화하려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정영선은 “시에서 대부분 영감을 얻는다. 작업이 안 풀릴 때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조경과 관련된 자료를 어떻게 전시로 풀어낼 수 있을까. 정영선 조경의 방법론을 따왔다. 유리로 된 바닥에 전통 연못 형태인 정방진 형태의 전시공간을 조성해 관람객들은 발아래 자료를 볼 수 있다. 벽 중간에는 사진자료를, 그 위엔 파노라마 영상을 설치해 관람객은 경관을 보고 땅을 읽는 ‘정영선 조경론’을 체험할 수 있다.
땅과 자연에 대한 지극한 사랑
난개발이 난무하던 시절, 정영선은 하천 습지와 생태를 복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투사가 됐다. 빌딩 숲 사이에 야생적 숲과 습지를 조성한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이 대표적이다. 습지의 식생을 관찰하고 습지의 경관을 그대로 복원하려 한 정영선의 계획에 공무원들이 반대하자 김수영 시인의 ‘풀’을 읊으며 끝까지 설득했다. 산업 시설물이던 정수장을 공원으로 재탄생시킨 선유도공원도 마찬가지다. 정수장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그대로 살리면서 수생식물을 심어 생태적 방식으로 한강물을 정화하게 했다.
정영선은 지난해 ‘조경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한 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병든 지구를 물려줘서는 안 된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지구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는 조경가들에게 건투를 빈다”라고 말했다. 전시 끝에 느껴지는 것은 이 땅과 자연, 생명과 지구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마당과 종친부마당 2곳에서 정영선이 조경한 정원을 볼 수 있다. 정원은 3년 동안 유지된다. 전시는 9월22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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