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편한’ 베트남 간 푸틴, 원자력 투자·관계 강화 약속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베트남을 다섯번째로 방문해 양국 우호 발전과 원자력 분야 투자 등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된 푸틴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여론이 좋은 베트남을 방문해 관계 강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20일(현지시간) VN익스프레스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오전 1시50분쯤 베트남 수도 하노이 노이바이공항에 도착해 국빈방문 일정을 시작했다. 북한 방문 당시 지각한 여파로 베트남에도 약 2시간 가량 늦게 도착해, 당초 19~20일 베트남에 머무를 예정이었지만 당일치기로 축소됐다.
이날 오후 12시쯤 푸틴 대통령이 또 럼 베트남 국가주석과 회동하기 위해 베트남주석궁에 도착하자, 탕롱황성에서는 예포 21발이 발사됐다. 푸틴 대통령은 만 하루가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또 럼 주석에 이어 팜 민 찐 총리,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총비서, 쩐 타인 먼 국회의장과 각각 회담한다.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럼 주석은 양국이 “서로의 독립·주권과 영토의 온전성을 해치는 제3국들과의 동맹과 조약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한 “베트남은 다자적 외교 정책을 갖고 있지만 항상 구소련과 러시아의 지원을 기억하며, 러시아는 베트남 외교 정책의 우선순위 중 하나”라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회담에서 “베트남과의 관계 강화가 우리의 우선순위 중 하나”라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양측은 러시아 국영 원자력 기업 로사톰의 베트남 내 원자력 과학기술센터 프로젝트를 위한 양해각서, 고등교육 분야 협력, 과학 교류 협력 등 11개 사안에 관한 문서에 서명했다. 20여개 문서 합의란 전망에는 미치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건 이번이 다섯번째다. 마지막 방문은 2017년이었다. 베트남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5월 5선에 성공한 이후 중국과 북한에 이어 세번째로 방문하는 국가다. 푸틴 대통령은 베트남 공산당 기관지 ‘년전’ 기고에서 “우크라이나 위기에 대해 균형잡힌 입장을 보여준 베트남 친구들에게 감사하다”며 “베트남은 국제법과 평등 원칙에 기초한 공정한 세계 질서의 강력한 지지자”라고 칭찬했다.
베트남은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데다 국제적 평판이 땅으로 떨어진 푸틴 대통령이 마음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다. 베트남이 ICC 회원국이 아니라는 점 외에도 양국은 1950년 수교한 이래 줄곧 우호 관계를 형성했다. 양국 관계는 최고 수준인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이며 권력 서열 1위 응우옌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총비서를 비롯한 베트남 지도부에는 러시아(구소련) 유학파가 많다. 양국은 국방 영역에서 특히 밀접해, 베트남 무기 중 러시아산의 비중이 약 60~70%에 달한다는 연구도 있다.
현 시점에 푸틴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건 국제적 고립을 깨기 위한 시도라는 평가가 나온다. 칼 테이어 호주국방사관학교 교수는 “푸틴이 북한과 베트남에 간 것은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서구의 시도가 효과가 없으며 러시아가 아시아에 파트너가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베트남 대중의 여론도 푸틴 대통령에 우호적이다. 그의 방문을 앞두고 하노이에선 러시아 기념품 판매가 늘어나는 등 주민들이 환영에 나섰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이는 베트남 내에 푸틴 대통령이 베·러 관계를 끌어올렸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싱가포르 유소프이샥연구소의 이안 스토리 선임연구원은 “베트남인들은 고르바초프가 1980년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베트남을 버렸다고 생각하며, 옐친은 90년대 내내 베트남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에 전했다. 이어 “푸틴이 2000년 집권하며 많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베트남 국민과 지도부는 그것에 감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베트남 국방부 기관지는 “푸틴 대통령은 베·러 관계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항상 베트남에 좋은 감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 고위 지도자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고 평가했다.
베트남으로선 이번 방문이 ‘대나무 외교’의 시험대일 수 있다. 베트남은 최근 중국과 동해(남중국해) 문제로 날을 세우고 미국과의 관계를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등 서구에 가까워진 듯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때 러시아와의 우호를 강조해 균형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트르담국제안보센터의 캉 부 연구원은 “러시아는 중국처럼 베트남의 외부 안보를 위협하지 않으며, 미국처럼 내부 안보를 위협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닛케이아시아에 밝혔다.
그러나 베트남 주재 미 대사관이 이번 방문을 두고 “어떤 나라도 푸틴 대통령에게 침략전쟁을 조장하거나 그의 잔학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해선 안된다”고 지적한 점을 간과하기 힘들다. 미대사관은 푸틴 대통령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노골적인 국제법 위반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부 연구원은 “베트남이 푸틴을 초청한 것을 두고 미국이 불편해하기 때문에 베트남은 막대한 리스크에 마주했다”고 평가했다.
윌슨센터의 프라샨스 파라메스와란 연구원은 “베트남은 새로운 파트너와의 관계를 다양화하는 동시에 핵심적인 전통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 간 긴장이 고조되는 환경에서 러시아를 신중하게 조율해야 한다”고 AP통신에 밝혔다.
김서영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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