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프 픽션’, 싸구려 소설 독자의 마음에 가까워지기 [영화와 세상사이]
1994년 10월, 미국의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토크쇼 진행자 찰리 로즈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 ‘펄프 픽션’(1994년)의 플롯과 이야기 전개 방식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는 “내가 만약 펄프 픽션을 소설로 써내고 이 쇼에 나왔다면 당신(진행자)은 이야기 구조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하지 않을 것”이라며 “왜냐하면 소설은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즉, 소설가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있어 완전한 자유가 보장돼 있다. 그게 바로 내가 영화에서 하고자 하는 영역”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급작스러운 사건이나 놀랄 만한 반전을 말하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펼쳐지는 무언가”라고 덧붙인다.
타란티노에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 펄프 픽션이 어느덧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의 영화가 여전히 기묘한 활력을 뿜어낸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각종 대중문화 코드에 기댄 채 과감하고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텔링으로 세계를 구축해온 타란티노의 작품들 중 펄프 픽션에는 유독 앞서 타란티노가 밝힌 그의 ‘이야기 철학’이 꿈틀대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펼쳐져야 하며 정해진 틀 없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전달돼도 문제가 없다는 것. 이런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본다면 타란티노의 내면과 소통해볼 수 있지 않을까.
20세기 미국에선 질 낮은 종이에 인쇄해 저렴한 가격에 팔던 싸구려 소설 잡지, 일명 ‘펄프 픽션(Pulp Fiction)’이 유행했다. 그 속은 로맨스, 공상과학(SF), 오컬트, 호러 등 각종 장르를 욱여넣은 데다 자극적인 소재로 점철된 콘텐츠로 가득했다. 그래서인지 영화 펄프 픽션 역시 언뜻 보면 마치 싸구려 잡지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시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곱씹어볼수록 이 영화가 그런 싸구려 소설 내지는 잡지를 뒤적이는 이의 심리 자체를 스크린에 녹여내는 작품처럼 다가왔다는 게 중요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특정 구간마다 암전 상태로 쪼개지는 영화의 각 시퀀스를 잡지 속 각각의 섹션으로 간주해보자. 그리고 관객들을 이제부터 잡지를 읽는 독자로 설정해보자. 가상의 독자 A씨는 밥을 먹다 식당을 털어 보자는 허술한 커플 강도의 사연을 읽다가 문득 잡지의 구성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훌쩍 넘기니까 미아와 빈센트의 이야기도 나오고, 또 수십 페이지를 건너뛰니 복서 부치의 이야기도 나온다.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시원치 않아 이리저리 뒤적이다 결국 처음 읽었던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렇게 펄프 픽션을 접하는 A씨는 마침내 잡지를 덮고 따분한 감정을 표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실 영화 속 배치된 신과 시퀀스 순서는 얼마든지 달라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매력으로 꼽는 수미상관 구조 역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끝없이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면 그저 ‘잡지를 뒤적이는 독자의 마음’에 기대 넘겨 버릴 수도 있다. 애초에 각 인물이 겪었던 서사가 순서대로 짜맞춰지는 작업 자체는 이 영화에서 아무런 의미도 얻지 못한다. 그러니까 지금 제시된 편집 순서는 그저 하나의 판본일 뿐 얼마든지 다른 판본의 펄프 픽션이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저 타란티노가 최종 편집본을 매듭지을 당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버전의 싸구려 잡지를 접하고 있는 셈이다.
지면을 영화로 불러낸 펄프 픽션처럼 매체의 전이를 형상화하는 시도들이 간혹 있다. 게임을 영상으로 옮겨 놓은 듯한 ‘하드코어 헨리’나 ‘카터’라든가, 잡지라는 형식에 매달려 그걸 영화로 풀어낸 듯한 ‘프렌치 디스패치’, 회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불러낸 ‘끝없음에 관하여’ 같은 작품들 말이다. 이때 펄프 픽션은 스스로가 싸구려 잡지임을 선언하나 오히려 잡지 그 자체로 보기엔 다소 의아한 구간이 많다. 스스로가 형식을 의도적으로 무너뜨리고 특정 양식에 갇히지 않으려 발버둥 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타란티노는 영화라는 매체를 빌려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어낸 셈이다.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창작자와 관객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늘 플롯이 선형적이어야 한다는 강박, 늘 서사는 기승전결이 뚜렷하고 사건이 예측 가능한 선에서 완벽한 타이밍에 발생해야 한다는 법칙 등 창작자라면 암묵적으로 따라야 하는 요소들이 있을 테다. 타란티노는 이런 것들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그렇게 타란티노가 마구잡이로 펼쳐 놓은 이야기 덩어리들은 관객 저마다에게 다른 기준과 방식으로 스며들면서 개개인의 기호에 맞는 싸구려 잡지로 변모한다. 그렇게 펄프 픽션은 잡지를 보는 독자의 내면에 가까워지게 만드는 매개체이자 윤활유가 된다.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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