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으로 꽉 찬 전쟁터···아버지 시신 안고 걷고 또 걸었네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일생일대의 섹스’를 하고 있던 새벽 3시, 윌프리드는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연락한 지 오래돼 존재가 희미했지만, 아버지는 아버지다. 윌프리드는 아들의 도리로 아버지의 시신을 묻기 위한 여정을 떠난다.
서울시극단이 초연 중인 연극 <연안지대>는 내전을 피해 레바논을 떠나 캐나다에 정착한 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다. <연안지대>는 무아와드의 ‘전쟁 4부작’ 첫 번째 작품이다. 두 번째 작품 <화염>은 드니 빌뇌브가 연출한 영화 <그을린 사랑>으로 제작돼 널리 알려졌다.
<화염>이 전쟁의 끔찍한 후과를 다뤘다면 <연안지대>는 전쟁의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윌프리드는 시신 묻을 땅을 좀처럼 찾지 못한다. 어머니 곁에 묻으려 했지만, 친척들의 거센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조금씩 부패해가는 시신을 안고 이곳저곳을 떠돌지만, 전쟁이 휩쓸고 있는 이 지역에선 다른 시신을 파내지 않고서는 새 시신을 묻을 땅이 없다. 윌프리드는 떠돌며 자기 또래의 여러 사람을 만난다. 누군가는 아버지인 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였다. 누군가는 부모가 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한 후 말할 때마다 “히히” “하하” 하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넣는다. 누군가는 남자 친구를 잃은 뒤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두툼한 전화번호부에 적힌 이름을 외운다. 총을 휘두르며 위악을 떨기도 하고, 연약해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기도 하지만, 이 젊은이들 모두 제대로 장례 치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윌프리드 아버지의 시신은 모두를 위한 장례식의 소재가 된다. “시신은 하나, 비석은 여러 개”가 된다.
전쟁의 참상이 직접 묘사되진 않지만 인물들의 대사로 전해지는 상황은 끔찍하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처럼 친족 살인과 근친상간이 벌어진다. 신화처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벌어진다는 데 진짜 비극이 있다.
한없이 무겁고 비참한 이야기지만, 김정 연출은 관객이 극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윌프리드의 초반 일부 대사는 라이브 드럼 연주에 맞춰 랩처럼 쏟아진다. 윌프리드가 겪는 상황을 영화처럼 촬영하는 감독이 등장하기도 한다.
‘영원한 고아’가 된 청년들은 부모 없는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김 연출은 지난해 다섯 시간짜리 연극 <이 불안한 집>으로 화제가 됐다. 2017년 <손님들>로 각종 연극상을 휩쓴 뒤 감각적인 미장센과 연출력으로 연극팬들의 주목을 받아온 젊은 연출가다. 김 연출은 “어른들이 물려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떠안은 아이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봐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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