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최전선에서 ‘규제’를 ‘기회’로 만드는 전략 [삼일 이슈 프리즘]
권미엽 삼일PwC 지속가능성플랫폼 파트너
전 세계 주요국의 지속가능성(ESG) 공시 시간표가 빨라지고 있다. 공시 기준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는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월 유럽의 지속가능성 정보공개 제도인 기업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을 발표한 데 이어, 2024년부터 상장 대기업을 시작으로 지속가능성 공시가 의무화 됐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3월 최종안을 확정했으나, 미국의 화석연료 기업이 청원한 SEC 기후 공시 규칙 효력 정지 신청을 미국 남부 5개 주를 관할하는 연방법원이 받아들여 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호주, 영국, 일본의 규제기관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호주는 올해 1월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 초안을 발표하고, 상반기 내 공시기준을 확정하여 2025년부터 기업 규모에 따라 순차적으로 공시를 의무화할 예정이다. 영국은 2026년부터 공시를 목표로 2024년 말까지 공시 의무화 규정을 확정하고 자국의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을 내년 1분기 내 확정할 것으로 발표했다. 지난 4월 자국의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초안 발표한 일본은 내년 3월까지 공시기준을 최종 확정하여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기업에게 공시 의무화를 부여할 가능성이 크다.
빨라지는 공시 시간표…K-지속가능성 공시 초안 공개
한국은 지난 4월 말 한국회계기준원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를 통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 공개 초안’을 발표했다. KSSB의 공시 기준은 다른 국가의 공시 기준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 146개국이 도입한 회계기준을 만든 국제회계기준(IFRS) 재단의 산하 기관인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가 제정한 공시 기준을 기반으로 한다. 즉, ISSB의 공시 기준은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의 국제적 표준이라고 볼 수 있다. KSSB는 국제 표준을 따르면서도 기업 부담을 줄이고 국내 상황을 반영해 일부 항목에 차이를 두는 방향으로 초안을 제정했다는 입장이다.
한국회계기준원은 공개 초안을 바탕으로 4개월간 의견 수렴을 거쳐 오는 하반기 최종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공시 대상, 시행 시기 등에 대한 일부 과제가 남아 있지만, 공시 기준이 최종 확정되면 국내 산업 및 자본 시장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보인다.
기업의 지속가능성 관련 재무정보 공시 기준이 확정되고 해당 정보의 공시를 의무화하는 규제 기관의 움직임은 그동안 비재무 정보로 여겨졌던 지속가능성 정보가 기업의 재무성과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공시 기준에 맞춰 보고한다고 끝난 게 아니다. 기업 리더는 자본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법적 규제를 준수하고, 기업의 새로운 경쟁력을 발굴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다음은 기업 리더가 지속가능성 공시를 규제가 아닌,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취해야 할 다섯가지 전략이다.
기업 리더, 공시 기준부터 정확히 이해해야
먼저 기업 리더는 공시 기준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관련 위험이나 기회가 중장기적으로 기업 재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고, 기업가치 극대화를 위해 기업이 어떤 전략을 통해 위험과 기회에 대응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방향 설정이 돼야 한다. 이에 기업은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공시를 준비해야 한다. 기업 경영진과 담당자는 국내 공시기준 요구 사항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따른 기업의 준비 상황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회사가 관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이고, 그에 대한 전략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둘째, 기업 리더는 지속가능성 정보 공시를 위한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지속가능성 공시는 재무제표와 연계성이 높은 정보다. 국내 공시기준 초안은 지속가능성 공시 정보와 재무제표의 연계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공시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온실가스 배출량 정보를 포함한 지속가능성 정보를 자격조건이 되는 제3자 독립기관으로부터 인증을 의무화하는 유럽, 미국 등 주요 국가의 규제 방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제공하는 정보의 정확성 및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제3자 인증을 의무화하겠다는 취지이다. 이를 위해 재무제표 내부통제를 관리했던 최고재무관리자(CFO)는 지속가능성 내부통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셋째, 기업 리더는 지속가능성 이슈에 대한 거버넌스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글로벌 3대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과 국내 기준 모두 기업의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진 경영진과 이사회가 지속가능성 이슈를 얼마나 인지하며, 이를 어떻게 관리 및 감독하고 있는지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지속가능성을 공시를 위한 도구가 아닌, 리스크 관리 관점으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여러 기업이 지속가능성위원회 등 지속가능성 중심의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있지만, 보다 실효성 있는 개선이 필요하다. 기업은 지속가능성 중심의 거버넌스 체계가 실효성을 갖출 수 있도록 새로운 조직 문화와 핵심성과지표(KPI) 설정, 관련 내부통제 기준 등을 마련해야 한다.
공시 기준, 기업 전략의 새로운 이정표로 삼아라
넷째, 지속가능성 공시는 지속가능한 전략을 위한 새로운 이정표다. 지속가능성 공시를 포함한 기업의 지속가능성 전략이 기업 이익을 축소하는 것이 아닌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정립돼야 한다.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이정표로 삼아 회사가 관리해야 할 중요한 지속가능성 관련 이슈가 무엇인지, 그에 대한 전략이 무엇인지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전사적 차원의 투자 규모와 방향을 세울 수 있다.
덴마크 국영 에너지사인 '오스테드(Ørsted)'는 지속가능성 공시를 통해 기업의 전략적 방향을 수립해 나간 이상적인 사례다. 오스테드는 석유 및 천연가스를 생산하던 사업 구조에서 해상풍력 중심의 친환경 에너지로 사업구조를 개편해 시장에서 성공을 이끌었다. 오스테드는 2005년 기업책임 보고서를 시작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EU 지속가능성공시지침(CSRD)에 따른 기준(ESRS)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해 규제에 선제 대응하고 자사의 지속가능성 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업은 지속가능성 공시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해야 한다. 기업은 지속가능성 공시 기준을 기반으로 자사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 새로운 기회 창출을 위한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업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사업 부문을 매각하거나 분할해 예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식이다. 또는 산업 재해 예방에 특화된 기업을 인수해 사회적(S) 위험을 줄이는 전략적 인수합병(M&A)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글로벌 회계 컨설팅 그룹인 PwC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업 임원진의 절반이 기후 변화를 보통 혹은 심각한 비즈니스 위기로 간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외 혼란스러운 변화 속에서 최고 경영진은 지속가능성 관련 규정 준수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에도 충분히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변화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사회적 문제에 앞장서는 기업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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