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13.연천 백학역사박물관

경기일보 2024. 6. 20.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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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인근에는 경기도 최초로 의병의날 기념식이 열렸던 백학광장도 위치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길 옆 삼각형 기둥을 왜 먼저 보여주는 것일까? “삼각형으로 보이지만 모서리를 깎아 사실은 육면이지요. 아래 윗면까지 합해 팔면이 되도록 만든 것은 3·8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백학역사박물관 금가현 관장의 설명을 들으니 평범하게 보이던 마을 길이 새롭게 다가온다. 광복을 맞은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남북을 나누는 금단의 표지를 세웠던 현장을 지켜봤을 연천군 백학면 주민들은 1945년 여름을 어떻게 기억할까?

■ 숨은 영웅 지게부대와 아침해를 기리는 백학마을

백학마을이 간직한 특별한 역사와 마주하기 위해 백학광장부터 찾는다. 백학은 ‘제1호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이다. 광장에 설치된 한반도 모형과 펄럭이는 태극기가 이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난 6월1일 이곳 백학광장에서 ‘의병의 날’ 행사가 열렸지요. 경기도 최초의 일입니다.” 광장 중앙에 병풍처럼 장식한 조형물에 새긴 ‘숨은 영웅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금 관장의 설명을 들으며 대리석에 새긴 그림과 안내문을 살핀다. 아침해(Reckless) 생애: 1946년 7월~1968년 5월 3일. 복무기간: 1952년 10월26일~1959년. ‘미국 제1해병사단에서 군마로 활약하면서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임무를 끝까지 완수해 미 해병대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지게에 포탄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지게부대’의 활약상을 알리는 글을 새겨 놓았다. 그렇다! 이름도 낯선 지게부대와 군마 레클리스가 바로 ‘숨은 영웅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지게를 통해 포탄과 식량 등 40kg이 넘는 물자를 지게로 운반했던 지게부대원 및 노무자부대원 어르신들의 사진들이 걸려있다. 윤원규기자

■ 주민들의 정성으로 세운 마을박물관

백학역사박물관 입구에 ‘호국영웅정신계승마을’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박물관이 있는 건물 1층은 ‘DMZ마을여행사’다. 때문에 박물관 안내를 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용맹한 사람들의 후예’ 담당자의 연락처를 적어 놓았다. 박물관의 전시실이 초등학교 교실 한 칸 정도만큼 작은 것도 놀라운데 그마저 지하다! 박물관 출입문 앞에 연두색으로 그린 백학면 지도가 한반도를 닮았다. “지도 한가운데로 점선과 좌우 두 개의 선이 지나가는 것은 휴전선이 백학면을 통과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지도 앞에는 숨은 영웅들이 사용했을 법한 낡은 지게에 녹슨 탄약통이 실려 있다.

백학면 100년의 역사를 담은 그림으로 채운 박물관 벽면이 인상적이다. 태극기를 들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표정이 결연하다. “1919년 3월21일, 두일리 장날에 200여명의 주민들이 만세를 불렀습니다. 연천지역 만세운동은 백학면 두일리장터에서 시작됐지요.”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그림이 또 등장한다. 1945년 8월15일 광복의 기쁨을 묘사한 그림 속의 사람들 표정이 밝고 환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림은 바탕 색깔이 어둡고 침울하다. 분단된 지 2년 만에 3·8선이 지나가는 백학마을은 격전지가 됐다. 전투기가 날고 포탄이 터지며 집이 부서지는 참혹한 광경, 지게에 포탄을 지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과 인민군의 탱크에 맞서 바주카포를 쏘는 국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광장에서 보았던 영웅 ‘레클리스’가 포탄을 메고 산을 오르는 그림도 있다.

1919년 3월 21일 두일리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부터 치열했던 한국전쟁 당시까지 근현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전시장 전경. 윤원규기자

■ 낡은 철모와 수통에서 찾아낸 자유와 평화

수색대대 병사들이 사용했던 식기와 반합,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듯 흙이 켜켜이 묻은 탄약통과 수류탄이 보인다. 갈현리에서 발견된 박격포탄을 기증한 사람은 주민 주윤기 씨, 60㎜ 포탄의 기증자는 박물관 설립을 주도한 금 관장이다. 개머리판이 사라진 소총과 녹슨 탄피, 영국군과 미군이 사용했던 철모도 있다. 가운데 구멍이 뻥 뚫렸으니 이 철모의 주인은 아마도 전사했으리라. 삐라로 불리는 전단도 여러 점이 전시됐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개로 묘사한 그림과 ‘각을 뜨자!’란 구호가 새겨진 삐라는 자세히 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야전삽과 곡괭이와 호미는 6·25전쟁 당시 우리 국군들이 호를 파거나 진지를 구축할 때 사용했던 유물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3·8선 부근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의 실상을 알려주는 특별한 유물이다. 이러한 전쟁 유물을 발굴해 마을에 기증한 수색대대 지휘관의 마음이 갸륵하다. 1950년대의 담배 ‘학’과 낡은 성냥갑도 지나간 세월을 알려준다. 지게부대 부사관으로 활약한 금동훈 유공자가 남긴 말이 가슴에 먹먹하다. “지게부대가 군복 없는 군인들이었지. 서른부터 뽑는데 난 열일곱에 들어갔지 뭐야. 밥도 못 먹고 하루에 오십리를 걸어 다녔는데 포 떨어지면, 배 뒤집히면 옆이고 앞뒤고 그냥 다 죽는 거야. 명예도 군번도 없었어.”

금 관장이 가리키는 흑백사진을 자세히 살펴본다. 지게를 진 소년병이 전쟁과 배고픔을 경험한 적 없는 관람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한 끼 밥이, 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느냐?” 낡은 손목시계와 휴대전화, 통제구역을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이 온몸으로 전쟁을 겪고 이 마을을 지키며 살아간 한 사람의 고단한 일생을 증언하고 있다. 출판사 봄봄에서 펴낸 ‘달려라, 아침해’는 2015년 세종도서에 선정된 동화책인데 6·25전쟁의 숨은 영웅 레클리스의 활약을 그리고 있다. 두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홍순겸 독립유공자를 비롯해 6·25전쟁에 참전해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강중기 유공자까지 16분의 숨은 백학 출신 영웅의 사진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춘다. 미 해병대가 영웅 레클리스와 찍은 사진이다. 통신 전선을 말 안장에 매단 사진 아래에 이런 설명문이 붙어 있다. “이 작은 망아지는 열 명의 해병대원보다 더 많은 양의 통신 전선을 감을 수 있었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윤원규기자

■ 아침해와 함께 통일을 꿈꾸는 마을

제주에서 태어난 암컷 경주마 ‘아침해’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두 달 정도 훈련을 받고 미 해병대에 소속된다. 아침해의 활약은 모두의 상상을 넘어섰다. 차가 갈 수 없는 험한 길을 달리며 포탄을 실어 날랐고, 한두 번 동행하면 혼자 보내도 길을 찾아냈을 정도로 영리했다. 산길을 오를 때는 물자를 실어 날랐고, 내려올 때는 다친 병사들을 데리고 복귀했다. 특히 1953년 3월 연천지역에서 중공군과 벌인 ‘네바다 전투’에서는 닷새 동안 쉼 없이 물자를 옮기며 승리의 주역이 됐다. 이때 미 해병대는 아침해에게 ‘무모할 정도로 용감하다’는 뜻의 ‘레클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레클리스는 5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1959년에는 최초로 하사로 진급한다. 1997년 미국의 ‘라이프’지는 레클리스를 워싱턴과 링컨, 마더 테레사와 함께 100대 영웅으로 선정한다.

마을 곳곳에 그려진 벽화를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윤원규기자

■ 2천600명 주민 모두가 주인공

2021년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사업으로 마련한 DMZ백학문화활용소 역시 훌륭한 전시실이다. 문화활용소 벽에 백학마을 주민 모두의 이름을 새긴 2천600개의 명패가 붙어 있다. 2017년 우수마을기업 경진대회에서 수상한 상패, 따복공동체 활성화 유공 표장 등 지난날의 시간을 추적할 수 있다. 2018년부터 백학중학교와 DMZ백학문화마을사업단이 함께 2003년에 5호를 펴낸 ‘백학마을 이야기’도 현재 진행형이다. 마을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다문화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레클리스 카페’도 백학역사박물관의 특별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커피를 마시며 카페를 둘러본다. 6·25전쟁 당시 미 해병과 찍은 레클리스 사진, 백학을 찾아 방한했던 미국 참전 용사들의 자필 서명, 연천군 출신 참전 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물도 전시됐다. “영웅마 레클리스를 알리기 위해 2014년부터 ‘아침해 기념사업회’를 결성했지요.” DMZ백학문화마을사업단은 백학면 적십자와 지역 군부대, 주민들의 도움으로 레클리스 일대기를 20여개의 그림으로 표현한 ‘아침 해맞이길’도 만들었다. 이처럼 백학역사박물관은 지역의 여러 문화공간을 전시실로 삼고 있는 아주 특별한 박물관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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