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윈도 없는 ‘빵지순례’ 명소...고소한 냄새에 시골마을이 북적
제주 토박이 출신으로 지역성 살린 건축물 설계
제주 돌담서 영감받은 ‘버터모닝’...마을과 조화
40평 부지, 삼각형 콘셉트로 풀어낸 ‘아뜰리에11’
평범한 빵집이라면 있는 전면 유리창이 없다. 갓 구운 빵이 진열된 매대나 제빵 공간도 볼 수 없다. 오직 후각을 자극하는 고소한 빵 냄새만 새어 나와 호기심을 자극한다. 잿빛 콘크리트 벽이 둘러싼 이 건물은, 제주 집집마다 있는 돌담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됐다. 멋 부리지 않은 투박한 외관이 주변 마을 풍경과 어우러진다.
이 빵집을 설계한 박현모(사진) ‘아뜰리에11’ 건축사사무소 건축사는 제주 토박이다. 제주의 고유한 지역성을 살린 건축물로 공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제주 애월에 빵집 ‘버터모닝’을 지을 때도 가장 먼저 마을 풍경과의 조화를 생각했다. 그는 “시골 마을 한가운데에 상점이 생기면 이질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최대한 화려한 장식을 걷어내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박 건축사가 건축주를 처음 만난 건 2015년이었다. 건축주는 대구에서 20년 넘게 빵집을 운영해온 40대 가장으로,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껴 이주를 결심했다. 건축주가 빵집을 짓고 싶다며 보여준 장소는 외진 시골마을 부지였다. 제주도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으로 나이가 지긋한 주민들이 모여 사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그가 “설계는 할 수 있는데 장사가 될까요?”라고 묻자 건축주는 “빵 맛만은 자신 있다. 금방 소문나서 손님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렇게 빵집 버터모닝이 탄생했다. 건물 외벽을 따라 걷다 빵 냄새에 이끌려 문을 열면, 환한 빛이 들어오는 중정을 마주한다. 중정 한가운데에는 푸릇한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다.
박 건축사는 “건축주에게 설계 초안을 제안했을 때 100% 수용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흔쾌히 수락해 놀랐다”며 “심지어 한글로 쓴 ‘버터모닝’ 간판까지 그대로 살렸다”고 말했다. 이어 “최대한 화려한 외관을 배제하고 기하학적인 도형 위주로 작업했다”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공간으로 유도되는 그림을 상상했다”고 밝혔다.
버터모닝은 2016년 제주 건축문화대상 특선을 수상했다. 이른바 ‘빵지순례’ 명소로도 입소문을 탔다. 마을 주민들은 “뭘 하는 곳이기에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냐”며 의아해했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현재는 사전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다. 제주의 대표 빵집 중 하나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셈이다. 다만 빵집을 둘러싼 주변 풍경은 예전 같지만은 않다.
제주도가 인기 거주지로 주목받으면서 개발 붐이 거세게 일어서다. 제주 애월이 한 유명 연예인의 거주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우후죽순 개발됐다. 저층 주택만 있던 마을에 공동 주택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마을 원형도 변했다. 박 건축사는 “주민들이 살던 집이 한집 한집 없어지는 것을 관찰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40평 협소 부지 활용...삼각형 형태 사옥으로 재탄생
박 건축사가 건축사사무소를 차린 건 2009년이었다. 작은 사무소지만, 강한 결속력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건축을 해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아뜰리에11’의 숫자 11은 제주의 가을을 상징한다. 그는 “제주도에서 11월은 ‘제주적’ 느낌이 가장 많이 나는 시기”라며 “갈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초현실적인 풍경이 연출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0년부터 사무실을 지을 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어려운 시기였다. 일반적으로 사무실을 지으려면 100평 규모 부지가 필요하지만, 제주 시내 땅값이 턱없이 비쌌다. 그는 “가장 불리한 땅”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만큼 저렴하게 부지를 매입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서다.
그렇게 찾아낸 땅이 제주시 이도동에 위치한 40평 협소 부지였다. 10년 전만 해도 협소 부지를 활용해 건축물이 짓는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2012년 공매를 통해 2억원 내외로 부지를 낙찰받았다. 이후 해당 부지가 자연녹지지역에서 제1종일반주거지역으로 종상향 되면서 지하1층 지상4층 규모 건축사사무소를 지을 수 있게 됐다.
박 건축사는 “사무실 땅은 작고 구불구불한 삼각형 형태였는데,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 외형적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로 설계했다”고 밝혔다. 그는 삼각형을 콘셉트로 건물을 풀어냈다. 사무실은 대로변에서 바라보면 사각형이지만,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5개 삼각형으로 구성돼 있다.
건물 꼭대기에 삼각형의 무게중심 지점은 과감하게 뚫어 빛을 내부 공간으로 끌어들였다. 아울러 옥상엔 한라산을 볼 수 있는 긴 파노라마 창호를 배치했다. 박 건축사는 “긴 모양 유리창을 바라보면 여기가 제주라는 느낌이 들 수 있게 제주 지역성을 건축물에 담았다”고 강조했다.
건물 내부도 모두 삼각형이다. 회의 책상도 뾰족한 삼각형 모서리에 맞게 맞춤형으로 제작했다. 그는 “건물 자체가 삼각형이다 보니 내부 유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가구를 불가피하게 삼각형으로 맞출 수밖에 없었다”며 “자연스럽게 조명도 삼각형으로 찾아 배치하니 오히려 공간이 돋보이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외면받던 협소 부지를 재해석한 아뜰리에11 사옥은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19 아시아건축상 우수상, 2019 한국건축문화대상 민간부문 우수상, 2020년 독일 IF디자인어워드 건축부문 본상 등을 수상했다. 박 건축사는 “제주도 신축 부지가 점점 줄어들자 협소 부지에 건물을 설계해달라는 작업 의뢰가 늘고 있다”고 밝혔다.
▶집의 고전적인 형태 재해석...중정을 중심으로 순환
제주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판포포구는 푸른 바다가 아름다운 장소다. 몇 년 전부터 스노클링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로 주목받자 박 건축사에게도 숙박시설을 설계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인근 400평 부지에 카페와 펜션, 편집숍 등을 운영하는 건축주는 일부 잔여 부지를 숙박시설로 활용하길 원했다.
제주시 한경면의 ‘아담스테이’는 판포마을에 어울리는 단순한 형태의 건축물이다. 박공지붕과 같은 집의 고전적인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건물 두 동을 ‘L’자로 배치해 주변을 제주 돌담으로 감쌌다. 박 건축사는 “집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를 고민해 보니 바닥·벽·지붕·굴뚝 네 가지 요소로 정리가 됐다”며 “최소한의 규격을 지닌 집 형태에 중간을 뚫어 중정을 넣은 형태”라고 설명했다.
건물 내부는 중정을 중심으로 순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으면 창밖 중정에 식재된 한 그루의 귤 나무를 볼 수 있고, 폴딩도어를 열면 자쿠지와 테이블이 있다. 박 건축사는 중정·거실·욕실·외부로 공간이 중첩되어 보이도록 설계했다. 작은 공간을 큰 공간으로 확장해 인식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난방을 담당하던 굴뚝 내부엔 냉방이 가능한 에어컨을 넣어 공간적 변형을 줬다.
그는 건축주와 협력해 잔여 부지를 작은 마을로 재탄생시키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존에 있던 카페 건물을 일부 시간대에 공유 가능한 공간으로 개방해 결혼식이나 파티 등을 열 수 있는 소규모 예식장으로 변형하는 방식이다. 과거엔 지역 주민들이 농수산물을 판매하는 오픈마켓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400평 부지의 잔여 공간을 식음·숙박·공연·전시·대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박 건축사는 “앞으로 건축사사무소가 설계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가구, 상징물(CI) 디자인, 문화 기획 등 공간의 성격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시대에 맞춰 변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로명 기자
dod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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