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금/둔 곳 까먹어서/아내에게 묻는다’…노년 일상 담은 시에 웃고 찡해져[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개찰구 안 열려/확인하니/진찰권’
‘요전에 말이야/이렇게 운을 뗀/오십 년 전 이야기’
노년의 일상을 예리하면서도 익살스럽게 담아 낸 시가 사랑받고 있다. 시집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에 담긴 작품들이다. 이 책은 올해 1월 국내 출간된 후 5개월 만에 4만 권이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서선행 포레스트북스 편집이사(47)를 서울 영등포구 포레스트북스에서 13일 만났다. 서 이사는 “너무 재미있어서 꼭 출간하고 싶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홍보도 별로 하지 않았는데 독자들의 호응이 뜨거워 깜짝 놀랐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반응이다”라고 말했다. 이 책은 초판을 내고 5일 만에 2쇄를 찍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은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에서 매년 열고 있는 ‘실버 센류’ 공모전의 2011, 2012년 입선작을 포함해 88수를 모았다. 제목도 수록된 시 중 하나다. 일본 정형시 중 하나인 센류(川柳)는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로, 풍자와 익살을 담은 게 특징이다.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는 2001년부터 매년 나이듦을 주제로 하는 ‘실버 센류’ 공모전을 열고 있다.
서 이사가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건 8, 9년 전 일본을 여행했을 때다. 서점에서 우연히 책을 보고 푹 빠졌다. 이전에 근무하던 출판사에서 출간하고 싶다고 제안했지만 책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 내지 못했다.
“저 역시도 그 의견에 동의했어요. ‘나나 좋아하지 누가 좋아할까’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도 이 책이 계속 마음에 남아서 포레스트북스로 옮긴 후 다시 출간하고 싶다고 제안했어요. 뜻밖에도 김선준 대표님이 ‘나도 이렇게 재밌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비용이 많이 들지 않아 제작비는 회수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어요. 회사에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 여겼죠.”
시집에는 노년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그려 웃음이 터지는 시가 많다. ‘비상금/둔 곳 까먹어서/아내에게 묻는다’, ‘미련은 없다/말해놓고 지진 나자/제일 먼저 줄행랑’, ‘몇 줌 없지만/전액 다 내야 하는/이발료’ 같은 작품이다.
남은 생의 시간을 가늠하거나 복용하는 약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을 담은 시는 웃음과 함께 애잔한 느낌을 준다. ‘LED 전구/다 쓸 때까지/남지 않은 나의 수명’,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내복약에 절어 산다’. 노년의 외로움을 가슴에 와 닿게 쓴 작품도 눈길을 끈다. ‘늙은 두 사람/수금원에게/차를 대접한다’, ‘혼자 사는 노인/가전제품 음성 안내에/대답을 한다’.
서 이사가 판권 구입을 위해 일본 출판사에 연락한 건 2022년 말이었다. 판권을 사려 한 국내 출판사는 없었다. 한데 판권 구매를 확정하기까지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책에 작품이 실린 분들이 소식을 듣고 ‘한국에 내 시가 소개된다니 엄청난 사건’이라며 놀라고 흥분하셨다고 해요. 가까이 사는 분들끼리 모여 한국 출간에 대해 논의했답니다. 일본 출판사에 연락할 때마다 계속 ‘지역별로 회의 중’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오늘 이 지역에서 회의를 하면 그 뒤 또 다른 지역에서 하고…. 지역별로 회의가 계속 이어졌대요.(웃음)”
지난해 여름 판권 구매가 확정됐다. 서 이사가 떠올린 번역가는 딱 한 명이었다. 이지수 번역가. 사노 요코의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키키 기린의 말’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아무튼, 하루키’, ‘우리는 올록볼록해’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글맛이 중요한데 이를 제대로 살릴 수 있는 분은 이지수 선생님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급하게 연락드리니 예상대로 번역할 책이 많아 일정이 빡빡한 상황이었고요. 제가 ‘책을 보면 번역 안 하실 수 없을 걸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될 거예요’라고 했죠.(웃음) 역시 책을 보시더니 ‘멈출 수 없다. 정말 재밌다’며 기꺼이 시간을 쪼개 번역해 주셨어요.”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주목을 받았다. 소셜 미디어에 시를 올리고 깔깔 웃는 반응이 이어졌다. 서평 기사도 연달아 나왔다. 일본어 원서를 읽고 싶어 하는 이가 많아 대형 서점에서도 이와 관련해 문의 전화가 왔다. 20~40대에서는 “부모님에게 선물로 드렸다”, “부모님과 대화할 소재가 생겼다”는 리뷰가 상당수였다. 직접 책을 산 고령층도 많았다.
“연륜에서 우러나온 통찰이 사람들을 웃게 하고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는 걸 실감했어요. 출판사로 쏟아지는 어르신들의 전화를 받는 신선한(?) 경험도 했고요. ‘일본어 원문을 왜 싣지 않았느냐’고 호통 치거나 ‘글씨가 왜 이렇게 크냐’고 물어보는 분, ‘책에 실린 글자수가 너무 적다’는 등 진짜 다양한 분들의 전화를 받았어요. 글씨 크기는 일본 책을 그대로 따른 거예요. 시집이기에 글자수가 적은 거고요. 제약회사에서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싶다는 연락도 받았어요. 그래서 건강 서적이 아니라 시집이라고 말씀드렸죠. 최종적으로 판매는 안 됐습니다.(웃음)”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지만 서 이사는 이 시집이 기존 시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한편으론 걱정이 됐다고 한다.
“일반인이 쓴 시를 담은 시집의 판매 순위가 높다는 게 신경이 쓰였어요. 뭔가 의도치 않게 시인들에게 누를 끼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장석주 박연준 시인 부부가 ‘이게 진정한 시다. 역시 시는 함축의 맛이지’라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씀해 주셔서 안심했어요.”
이 책의 후속으로 ‘실버 센류’ 공모전 최신 당선작을 담은 ‘그 때 뽑은 흰머리 지금 아쉬워’(가제)를 올해 12월 출간할 예정이다.
“12월에 낼 책에는 펜데믹과 마스크 착용 등 최근 사회 흐름을 담은 시가 많아요. ‘실버 센류’ 공모전 당선작을 시리즈로 내는 것도 고려 중이에요. 꾸준히 출간해 볼만한 책이라는 확신이 들고 있거든요.”
서 이사는 방송사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다 IT회사, 가구 회사 등에서 홍보 업무를 했다. 2007년 출판사로 옮겨 홍보를 담당하다 2015년 편집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에 없던 분야를 다루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를 발굴해 책을 낸 경우가 많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정문정 지음), ‘쇼펜하우어 아포리즘: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김욱 편역), ‘이은경쌤의 초등어휘일력365(이은경 지음)’, ‘죽음이 물었다, 어떻게 살거냐고(한스 힐터 지음·한윤진 옮김)’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만들었다.
“없는 것을 찾아내는 걸 좋아해요. 시간 날 때마다 드라마, 영화, 소셜 미디어, 웹툰 등을 보는데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마음 속 항아리’에 넣어두고 지켜봐요. 일종의 숙성을 시킨다고 할까요. 아닌 건 지우고 오래 남은 아이디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으로 내려 해요. 생각했던 내용이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성을 지닌 책으로 탄생하는 게 뿌듯해요.”
그는 어릴 때 집에 책이 별로 없어 틈만 나면 멀리 있는 도서관에 걸어가 책을 봤다고 한다. 친구에게 세계문학전집을 빌려 보기도 했고, 외가에 가면 책장에 꽂힌 이모의 두꺼운 책을 꺼내 푹 파묻혀 지냈다. 부모님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걸 물어보면 무조건 책이라고 답했다.
“어린 시절 책을 읽으려면 애써서 구해야 했던 목마름이 책에 대한 갈망을 더 크게 만든 것 같아요. 책에 둘러싸여 있으면 참 행복하거든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너는 나중에 책에 파묻혀 지낼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는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책을 구입한다. 좋은 책을 만들려면 책을 많이 사야 한다고 말한다.
“내 돈으로 책을 사면 어떤 책을 사고 싶어 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거든요. 구매자의 감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지갑을 열게 하는 포인트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는 영화 드라마 웹툰 등 콘텐츠는 물론 식당까지, 자신이 선택하는 취향이 극히 대중적이라고 했다. 예전에는 자기만의 개성이 없는 것 같아 아쉬웠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걸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단다.
“제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콘텐츠로 책을 만드는 게 진짜 재미있어요. 가능한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포레스트북스·2024년)은…. |
일본 사단법인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에서 매년 열고 있는 ‘실버 센류’ 공모전의 2011, 2012년 입선작을 포함해 88수를 모은 시집이다. 센류(川柳)는 일본 정형시 중 하나로, 5-7-5의 총 17개 음으로 된 짧은 시다. 풍자와 익살스러운 내용을 담은 게 특징이다.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는 2001년부터 매년 나이듦을 주제로 하는 ‘실버 센류’ 공모전을 열고 있다. 2001년 공모전을 시작할 때는 한 번만 열 예정이었지만 반향이 매우 커서 매년 개최하게 됐다. 2012년 최연소 응모자는 여섯 살, 최고령 응모자는 백 살이었으며 총 응모작 수는 11만 수가 넘었다. 작품들은 건망증, 병원 다니기 등 노년의 일상생활을 비롯해 연금, 돌봄과 관련된 고민처럼 사회적 이슈까지 폭넓게 다룬다. ‘전에도 몇 번이나/분명히 말했을 터인데/처음 듣는다!’, ‘이봐, 할멈/입고 있는 팬티/내 것일세’, ‘젊게 입은 옷/자리를 양보받아/허사임을 깨닫다’는 나이 들면서 겪는 일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다.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변하는 나이’, ‘심각한 건/정보 유출보다/오줌 유출’, ‘자기 소개/취미와 지병을/하나씩 말한다’처럼 노쇠한 육신으로 인한 변화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두 사람의 연애담/처음 들은/장례식 날 밤’, ‘서로를 돌보며/다시 한번 싹트는/부부애’처럼 삶과 죽음, 시간과 사랑에 대한 통찰을 담은 작품도 적지 않다. 노년층에는 웃음과 공감을 선사하고 젊은층에는 웃음과 함께 나이 드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을 읽으며 부모님을 더 잘 이해하게 됐다는 반응도 많다. 수상작 등을 모아 낸 시집 시리즈는 일본에서 누적 판매량이 90만 권을 넘었다. 입선자 중 한 명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상장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긴 인생 중 최고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상장은 나중에 관에 넣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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