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만에 1억 넘게 모였다 "피해자 일상은 지켜져야 할 권리에 공감" [스프]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일상을 깨뜨린 건 유튜브 영상이었습니다. 지난 1일, 유튜브 채널 <나락보관소>는 2004년 밀양 성폭력 사건 가해자의 신상 공개 영상을 게시했습니다. 영상엔 가해자들의 이름과 나이, 직장 등 개인정보가 자세히 담겼습니다. 직장에선 어떤 직급인지,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 누구와 어떤 관계를 이어오고 있는지 등 가해 사실과는 무관한 가십성 정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대중은 즉각 반응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던 가해자들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꽤 잘 산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이제라도 뒤틀린 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응징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어떤 가해자는 회사에서 해고됐고, 또 다른 가해자는 사업을 접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배제됐습니다. 가해자 신상 공개, 응징에서 비롯된 사적 제재 등 사건 재조명 과정의 주체는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피해자의 의사는 악의적으로 왜곡되고, 철저히 묵살됐습니다. 해당 유튜버는 자신이 피해자와 소통을 진행했고, 피해자 역시 신상 공개에 동의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건 발생 당시부터 20년 동안 피해자 지원을 이어오고 있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가해자 44명의 신상을 모두 공개하는 방향에 동의한 바 없다'고 밝혔습니다. 피해자가 영상 삭제를 요청했지만, 유튜버는 이조차도 거부했습니다. '(피해자는 원한 적 없지만) 가해자 신상 공개가 피해자를 위하는 길'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기 장사를 한 겁니다.
Q. 피해자가 처음 '가해자 신상 공개'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A. 영상이 게시된 당일, 피해자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상 게시 하루 이틀 뒤, 지인을 통해서 들어서 이 사실을 알게 됐고요. 신상 공개 영상을 먼저 접한 가족들이 특히 걱정이 컸습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이런 영상이 올라왔어. 조회수가 되게 높아'라고 말하기엔 피해자의 상처가 깊어질까 걱정돼서 피해자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이후 가해자 신상 공개 영상 게시 사실을 뒤늦게 안 피해자는 '신상 공개에 동의한 적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유튜버는 피해자, 피해자 가족의 의견 중 자신에게 유리한 의견만 취사선택해서 반영했고요. 피해자는 '가해자가 아닌 사람이 잘못 공표가 돼서 일이 커지면 어떡하지' 하며 놀라기도 하고, 여러 상황이 겹겹이 있기 때문에 긴장하고 두려워하는 상황입니다.
2004년 사건 발생 당시 수사기관이 피해자를 다시 한 번 짓밟았다면, 2024년은 유튜버일지도 모릅니다. 20년 전,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름, 거주지,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노출한 경찰과 검찰. 20년 뒤, 피해자와의 상의 없이 피해자를 재소환해 그저 성폭력 사건을 소비하기만 하는 유튜버. 자신들의 행동이 피해자의 삶을 얼마나 흔들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Q. 사건이 다시 재점화된 지금, 피해자는 어떤 방식으로 이 상황이 해결되길 바라나요?
A. 많은 분들이 피해자에게 '지금이라도 처벌하길 바라십니까?'라고 많이 물어요. 하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지금 이런 방식은 생각도 못 해본 일이잖아요. 피해자는 지금 여러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마음을 살피고 있어요. 사실 지금은 특정 유튜버가 가해자들을 한 명씩 오픈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에 대해서 '그래, 이게 내가 생각한 해결이었어. 내가 꿈꾸던 거였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올라오는 영상의 댓글 중에는 '피해자는 왜 더 용기를 안 내냐', '피해자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이런 댓글도 있거든요.
해결이라는 건 무언가를 꺼낼 수 있는 기회나 제도, 그 가능성이 있을 때 하는 말이잖아요. 지금 이건 피해자 본인이 통제하고 기획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애초에 피해자가 준비한 게 아니니 '이제 마음이 후련하십니까? 이걸 원하십니까? 원하지 않으십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것이죠.
피해자는 신상 공개의 취지를 떠나, 자신의 이야기인데도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았단 점에 분노했다고 김 소장은 전했습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단순 폭로전에 또다시 피해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Q. 유튜버 신상 폭로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피해자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피해자의 의견을 본인들의 콘텐츠에 유리한 방식으로 편집해서 공표하는 행동 등을 보니까 뭔가 잘못됐을 때 정정 가능하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피해자도 예측할 수 없는 절차구나' 싶었고요.
유튜버의 신상 공개는 명확한 룰이 있거나 한 게 아니에요. 유튜버 개인의 최소한의 윤리, 최소한의 상식, 최소한의 배려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피해자가 계속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집니다. 콘텐츠가 올라가면, 마치 불법 촬영물 유포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그 영상이 내려갈 때까지 계속 새로고침을 하는 시간이 시작되는 거예요.
유튜버가 신상 공개 영상을 게시하면 기다렸다는 듯 받아쓰는 언론의 문제점도 제기됐습니다. 피해자와 사전에 조율, 소통되지 않은 내용이 유튜브에 게시되고, 이를 기성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는 또 한 번 배제됐습니다.
A. 유튜브 영상과 기성 언론의 뉴스가 사실 되게 연동되어 있잖아요. '유튜브는 문제고 기성 언론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밀양 사건 언급되는 게 뭐라도 뜨면 피해자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고 얘기했습니다. 콘텐츠가 될 수도 있고, 거기에 달린 댓글이 될 수도 있고요.
김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가 일상에서 평온할 권리는 국민의 알 권리에 우선하는 생존권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누군가에겐 가십성 폭로, 누군가에겐 장사에 불과하지만 피해자에게는 일상이 파괴되는 문제라는 겁니다. 의도치 않게 다시 재소환된 피해자는 '이 사건이 잠깐 '반짝' 하고 피해자에게 상처만 주고 끝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지난 20년간 피해자가 단단해진 만큼, 사회 역시 피해자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피해자의 일상 회복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김 소장은 조언했습니다.
Q. 피해자가 겪은 성폭력 피해, 이번 신상 공개로 인한 2차 가해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이 필요할까요?
A. '성폭력 사건'이라고 하면 성적인 피해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이 끔찍하다는 등 행위를 중심으로 알려지지만, 피해자의 일상 회복 과제는 그보다 더 너릅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편견과 통념을 다 만나죠. 피해자 쉼터에 대한 설계, 주거권의 보장, 생계비 보장, 재활 등 장기적인 교육 훈련의 과정, 취약한 10대 시절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심리적인 지지망 형성 등을 너르게 설계했으면 좋겠습니다.
밀양 성폭력 피해자는 현재 아르바이트 월급과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는 가해자 부모들이 찾아와 합의를 요청해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취업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10대 때 겪은 성폭력 피해의 여파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모금을 시작했습니다. 모금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2,100여 명이 피해자 지원의 뜻을 밝혔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현재까지 2,891명이 모두 1억 1천여만 원을 후원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조윤하 기자 hah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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