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괴벨스의 교훈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2024. 6.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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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 판 치는 시대, 나치의 선동꾼 떠올라
언론·문화 극단적 통제…혐오의 문명, 야만이다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가짜뉴스와 혐오가 판을 치는 시대다. 각자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유튜브 알고리즘의 좁은 거울방 속에 웅크린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 세기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며 거짓 선동에 고의적으로 속아주었다. 진실에 대한 냉소야말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지난 세기에 희대의 선동꾼으로 악명을 떨친 괴벨스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시사점을 주는 인물이다. 그는 나치 집권기 독일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거짓 선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현대 미디어가 대중을 조종하는 데 가공할 효력을 갖는다는 점을 간파하고 가장 선도적으로 그것을 활용했다. 괴벨스에게 진실 여부는 전혀 중요치 않았다. “선전선동은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의 도덕적 가치는 지향하는 목표에 달려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독일 서북부 라인란트의 소도시 라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톨릭 배경의 소시민 가정 출신이었다. 근면했던 아버지는 육체노동자에서 공장 사무원으로 승진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어린 시절 하녀로 일했다. 넉넉지 못한 가정환경보다 괴벨스를 더 힘들게 한 것은 신체적 장애였다. 어린 시절 병치레를 하면서 오른발이 안쪽으로 굽어 다리를 저는 장애를 얻게 되었는데, 신체적 열등감은 진실과 정의에 대한 냉소와 더불어 강한 것에 대한 강박적인 추종 심리를 낳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급우들이 군에 입대할 때 그는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그는 학업에 목숨을 걸었다. 비상한 두뇌와 문학적 재능을 지녔던 그는 학창 시절 늘 우등생이었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 대표로 연설한 적도 있다. 명문대인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문헌학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는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하지만 패전의 후유증을 겪던 1920년대의 독일에서 그를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 고학력 백수로 떠돌던 그에게 나치당의 득세는 인생의 전환점을 제공했다. 나치는 원래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줄인 말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대충 결부시킨 정당이었다. 패전 및 독일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시작된 1920년대의 사회개혁적 분위기 속에서 괴벨스는 사회주의 혁명을 염원했으나 당시에 상한가를 달리던 공산당 대신 아직 미미하던 나치당을 택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히틀러의 봉기 소식에 감명받아서였다. 1923년 11월 남부 도시 뮌헨의 맥주홀에서 일으킨 봉기는 히틀러가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리는 첫 계기였다. 이 선동적 지도자는 실의에 빠진 청년 지식인에게 일종의 구원자로 보였다. 1926년 초 히틀러와 처음으로 대면한 괴벨스는 그의 일기에 적었다. “이 남자는 왕이 되는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었다.”

히틀러와 괴벨스는 실은 정치적 노선이 같지 않았다. 괴벨스가 처음에 활동하던 고향 라인란트의 나치당은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히틀러를 만나고 난 뒤부터 괴벨스의 생각은 바뀌게 된다. 히틀러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식 사회주의는 소련식 공산당처럼 자본가와 노동자가 계급투쟁을 벌이기보다는 오히려 독일 민족의 대동단결을 꾀했다. 그는 민족이 한데 뭉쳐 외부의 적인 유대인 자본가들에 대해, 또한 유대인이 주축이 된 국제 공산당 세력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모든 문제를 유대인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야말로 히틀러 이념의 특징이었고 박사학위까지 지닌 지식인인 괴벨스가 이런 단순 무식한 주장을 받아들인 것은 실로 놀랍다. 그는 이제 자신의 지성과 교양을 진실의 추구가 아니라 오히려 헛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진실을 억압하는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1933년 1월에 나치가 집권하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직에 오른 괴벨스는 온갖 법적, 불법적 수단을 총동원하여 언론과 사상, 문화를 극단적으로 통제하고 독일 국민을 무지와 혐오의 생지옥으로 몰고 갔다. 예컨대 매일 정오에 언론사 회의를 소집해 보도지침을 하달하는 모습은 어딘가 기시감을 주는 장면이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상대적으로 비중을 잃게 된 선전장관 괴벨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선전선동에 매진했는데, 유대인들을 잘 식별할 수 있도록 다윗의 별 배지를 착용하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아이디어였다. 그의 위상과 역할은 날로 상승했다. 전쟁 말기에 수도 베를린이 함락되어 갈 때까지도 나치의 주간뉴스는 여전히 독일의 승리를 선전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선전선동은 그 자신마저도 속였다. 히틀러의 측근들이 모두 배신하고 도망칠 때 괴벨스만은 자리를 굳게 지켰고 가족 모두를 음독 살해한 후 자살했다. 영웅적으로 죽어야 기필코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자고로 문명과 야만은 반대말이 아니다. 진실과 정의 대신 혐오와 열광이 판치는 문명은 곧 야만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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