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국제노동권지수와 AI의 시대
지난 12일 국제노총이 ‘국제노동권지수’를 발표했다. 국제노총은 169개 회원국에 약 2억 명의 조합원이 있고, 한국노총과 민주노총도 가입한 단체이다. 이날 발표한 국제노동권지수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정상국가’ 가운데 최하위인 5등급으로 분류되었다. 5등급인 국가는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단계’에 있는 국가로, ‘세계에서 일하기 가장 나쁜 국가’이다. 법률에 특정 권리가 명시되어 있을 수 있지만, 근로자는 사실상 이런 권리에 접근할 수 없고 따라서 ‘독재 정권과 불공정 관행에 노출’되는 국가로 정의된다.
노동권지수는 각국 현행법이 인정하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에 대한 법적 보호의 정도와 함께 노동 3권 침해사례 조사를 통해 평가된다. 보고서는 한국에 대해 “한국 정부는 검찰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범죄화함으로써 지속적으로 노동조합을 표적으로 삼았다. 경찰은 시위를 조직적으로 방해했고 조합원들은 구타당했다”고 쓰고 있다.
2014년 처음 발표한 이래 11년간 우리나라는 5등급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는 종종 국내에서 대한민국을 노동 후진국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된다. 문재인 정부 시절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ILO 사무총장에 입후보했을 때도 “노동권지수 꼴찌 국가에서?” 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또 노동권지수가 발표된 지난 12일, 우리나라가 UN 산하 국제노동기구인 ILO 이사회의 의장국으로 내정됐는데 매일노동뉴스는 ‘(ILO 의장국인데) 한국 국제노동권지수 11년 연속 최하위 등급’이라는 기사를 냈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국제노총의 노동권지수는 객관적인 평가로 보기 어려우며, 정부는 노사법치 및 노동 개혁을 지속 추진하겠다”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번 발표에서 흥미로운 것은 별도로 수록된 ‘노동권위반 조사서’에 나열된 각국의 사례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1년 11월 광주형 일자리 모형으로 현대자동차가 설립한 GGM이 비노조, 저임금 사업장이라는 것부터, 2009년 1월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 3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까지 모두 76건의 사례가 수록되어 있다. 이 조사서에서 필자가 다소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례들이 상당히 과거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2024년 조사서에서 가장 최근의 사례가 2021년 11월 현대자동차의 GGM 설립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서 받은 자료로 작성되었을텐데 이는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조사만으로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가 검찰을 부당하게 이용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범죄화했다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반박의 여지를 줄 수 있다.
국제 지표는 국가의 위상이란 측면에서 의미 있다. 2021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무역개발회의에서는 우리나라의 지위를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한 바 있다. 2022년 미국의 한 언론에서는 대한민국이 일본을 제치고 국력 세계 6위 국가로 올라섰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 6월 초 한국은행은 지난해 1인당 국민총소득이 일본을 제쳤다고 발표했다. 이런 지표가 발표되면 으레 기준이 바뀌었다거나, 실감하지 못한다거나 하는 비판과 부정적 평가가 뒤를 잇는다. 필자가 보기에 노동권지수에는 사례조사 부실의 문제가 있다.
여러 비판에도 이런 지표는 과거를 조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잣대로서의 의미가 있다. 이념적 지향도, 노동에 대한 태도도 전혀 다른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정부가 노동권지수를 내리 5등급을 받은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어떤 경제체제를 평가하는 기준은 효율성과 형평성이다. 시장경제는 효율성은 높지만, 형평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노동권지수가 낮다는 것은 형평성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것과 같다. 눈여겨볼 것은, 노동권지수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국가가 대체로 시장경제가 발전한 국가라는 점이다. 이는 효율성과 형평성이 따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챗 GPT를 시작으로 노동시장은 새로운 시대의 문 앞에 서 있다. 인간보다 정교한 일부 AI는 이미 인간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 효율성과 형평성을 겸비한 새로운 노동시장의 길, 최하등급 노동권지수라는 평가가 노동운동과 정부에 제시하는 숙제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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