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퍼 선거의 해’ 중간결산, 주요국 총선·대선 결과 3개 키워드
전 세계 70여 나라 40억 인구가 최소 한 번씩 표를 던져 행정·의회·지방 권력을 뽑는 ‘글로벌 수퍼 선거의 해’가 반환점을 앞두고 있다.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선거가 독재 공고화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한때 민주주의가 쇠락해 간다는 위기감이 확산했다. 실제로 절반이 지난 올해의 선거 결과를 중간 결산해 보니, 단독 출마해 재선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처럼 장기 집권 도구로 선거를 이용한 국가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도 보였다.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인 인도 유권자들은 압승을 자신하던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집권당에 ‘과반 실패’라는 뼈아픈 결과를 안겼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선 ‘넬슨 만델라의 당’이 참패하며 3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달 말 프랑스, 다음 달 영국에 이어 오는 11월 자유민주주의 종주국 미국의 총선·대선을 앞둔 시점에 2024년 선거 결과를 중간 점검했다.
◇국민의 ‘표’, 견제 기능은 했다
민주주의 선거는 무능·부패해진 권력을 국민이 가차 없이 ‘표’로 응징하며 힘을 발휘한다. 수퍼 선거의 해 ‘전반전’의 피날레 격이었던 인도 총선은 이런 선거의 순기능을 드러내며 권위주의에 밀리는 듯했던 자유주의 진영에 희망을 안겼다.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에선 10년 전 총리에 오른 모디가 경제성장이란 성과를 내세우며 압승을 노렸지만 유권자들은 등을 돌렸다. 5~6월에 걸쳐 치른 인도 총선에서 모디의 인도국민당(BJP)은 5년 전 303석에서 63석을 잃은 240석만을 얻어 의석 절반도 차지하지 못하고 연정으로 가까스로 집권했다. 높은 경제성장률과 해외 투자 실적으로 가리려 했던 빈부 격차, 힌두 민족주의에 대한 소수민족의 반감 등이 반(反)모디 표심을 결집했다는 분석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결과에 대해 “인도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충격적 선거 결과는 결국 인도를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갈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30주년을 맞은 남아공에선 ‘국민 영웅’ 만델라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낙제 ‘성적표’를 받았다. 줄곧 집권해 온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지난 5월 총선에서 처음으로 단독 의석 확보에 실패했고, 소수 정당과 꾸린 연정에 의존해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이 가까스로 연임에 성공했다. 만성적 에너지난과 생활고, 갈수록 악화하는 치안 상황 앞에서 만델라의 후광이 사그라들었다는 평가다.
‘선거의 해’를 열었던 대만의 총통(대통령 격) 선거에선 반중·친미 노선을 고수하는 민중당 라이칭더가 중국의 지속적 반대에도 승리하면서 처음으로 12년 집권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입법원(국회) 선거는 친중 국민당과 중도 민중당 등 야권이 과반을 이루는 여소야대 구도가 만들어졌다.
◇독재 정당화의 ‘도구’로도 악용
장기 독재가 이어지는 권위주의 국가에선 집권 연장을 정당화할 도구로 선거를 악용했다. 러시아의 푸틴이 대표적이다. 2000년 집권 후 선거 규정을멋대로 고쳐온 푸틴은 사흘간 치른 지난 3월 대선에서 5선 고지에 오르며 30년 집권(‘실세 총리’ 기간 포함)을 굳혔다. 존재감이 미미한 ‘허수아비 후보’를 세워 77%의 기록적 득표율을 달성한 푸틴은 최대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마저 2월 옥중 의문사한 상황에서 종신 집권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러시아의 실상은 자유 언론과 반대 의견을 짓밟은 국가에서 치르는 선거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남게 됐다. 푸틴은 자신이 ‘선거를 치른 대통령’임을 강조하면서, 전시(戰時) 비상 상황에서 헌법을 따라 제때 대선을 치르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정권을 ‘불법’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앞서 2월 치른 파키스탄 총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집권 여당인 파키스탄무슬림연맹 나와즈파(PML-N)가 최대 정적인 임란 칸 전 총리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고, 그가 이끄는 당의 로고 사용도 금하는 등 정적의 ‘손발’을 묶고 선거를 치러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1월 방글라데시 총선은 정치 명문가 출신 여성 총리 하시나가 압승을 거두며 이슬람권 국가에서 드문 장수 여성 지도자가 됐지만, 야당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얻은 승리라는 쓴소리가 잇따랐다. 중미 엘살바도르에선 2019년 1기 취임 후 ‘조직폭력배 일망타진’을 선포하고 7만여 명을 체포한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치안 불안에 떨던 국민의 호응을 얻어 85%라는 압도적 득표율로 2월 손쉽게 재선했다. 그의 공권력 행사 과정에 인권 탄압이 적지 않았다는 우려도 나왔다.
◇무늬는 ‘정권 교체’, 실상은 ‘상왕 정치’
임기 제한에 걸린 현직 지도자가 선거를 권력 승계 수단으로 활용하고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상왕(上王) 정치’도 여럿 나타났다. 이슬람권에선 드문 민주주의 지도자로 인기가 높은 조코 위도도(조코위) 대통령 후임을 뽑은 2월 인도네시아 대선은 집권당 후보가 참패했는데도 정권 재창출로 인식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 당선인 프라보워 수비안토는 명목은 야당이었지만 조코위의 아들(기브란 라카부밍 라카)을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삼으며 사실상 여당 후보로 여겨졌다. 10월 취임하는 차기 대통령 프라보워보다가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적과 아들을 한데 묶은 조코위의 ‘권력 승계 빅 픽처’와, 조코위가 아들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지가 더 주목받고 있다.
남성 중심 ‘마초 문화’가 강한 멕시코에서 이달 초 치른 대선에선 집권 여당의 클리우디아 셰인바움 후보가 6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역사상 첫 여성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10월 출범할 새 정부는 6년 임기(단임)를 마치고 물러날 멕시코 좌파의 대부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사실상 2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다. 오브라도르의 정치적 후계자인 셰인바움은 일찌감치 전임 정권 핵심 정책을 승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따라 멕시코 민생의 최대 위협인 범죄 조직에 대한 강력한 단속보다 유화책을 꾀하는 ‘총알 아닌 포옹 정책’을 비롯해 소득 분배, 복지 확대, 자원 국유화 등 종전 노선을 유지할 가능성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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