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를 업고 함께 떠난 여행
나를 찾아온 지인들, 팔 걷고 음식 나르며 함께 밤을 새워준 친구들
장례식장 찾을 때마다 절하고 관 들며 그와 나의 무게를 떠올린다
연극 ‘연안지대(Littoral·원작 와즈디 무아와드·연출 김정)의 주인공 윌프리드는 어느 날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는다.
윌프리드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버지가 왜 갑자기 돌아가셨는지, 아버지가 왜 고향을 떠나 평생을 떠돌았는지, 고향의 가족들은 왜 아버지를 어머니 곁에 묻는 걸 반대하는지, 윌프리드는 할 수 없이 죽은 아버지를 짊어 메고 여행을 떠난다. 세상 어딘가에 아버지를 묻을 장소가 있길 바라며.
하지만 전쟁의 혼란으로 아버지를 묻을 곳을 쉽게 찾을 수 없다. 윌프리드는 더 멀리 길을 떠난다. 그 여정에서 여러 이유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사람들을 만난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된 사람, 아버지의 모욕을 지켜본 사람, 태어났을 때부터 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그들은 모두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살아간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니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들의 감정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끝없이 분노하고, 누군가는 쉼 없이 웃는다. 누군가는 한밤중에 들판을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적는다. 이들은 각자의 이유로 윌프리드가 아버지를 묻는 여정을 함께한다. 남의 아버지를 함께 짊어지고 떠나는 여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상상한다. 지워졌던 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고, 아버지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꺼내고, 아버지에게 받지 못했던 위로를 스스로 받는다.
어느덧 그들은 남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를 짊어지게 된다. 그 긴 여정의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아버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 연극을 보는 내내 나도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갑자기 떠났을 때 정말로 모든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제까지 통화했던 아버지와 오늘부터 통화를 못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장례 방식을 서둘러 결정해야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의 수많은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유일하게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서둘러 찾아온 지인들이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의 사진이 차려지기도 전에 맨발 차림으로 달려온 사람이 있었고, 10여 년 전에 두어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이 한쪽 구석에서 사흘간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낯선 얼굴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날랐고, 아버지의 관을 들어주겠다며 발인날 새벽까지 잠을 안 자고 버티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남의 아버지를 챙겨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조문객이 적은 깊은 밤에 두런두런 얘길 나누며 나는 비로소 그들의 헌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도 나처럼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난 기억이 있었다. 그들 역시 오랜 세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지인들이 그런 일을 겪을 때, 그들 또한 자신의 심정일 거라는 상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의 부모가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나 또한 그날 이후 많은 지인들의 장례식장에 달려간다. 그들을 위해 절을 하고, 시간을 보내고, 관을 든다. 때때로 시간이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상주가 되어 멍하니 앉아있는 지인의 얼굴을 볼 때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멍하니 앉아있던 내 얼굴을 본다.
그들과 함께 사흘간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가끔 상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떠나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를, 아주 긴 세월 동안 천천히 떠나보내고 있다는 상상. 그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관을 함께 짊어지고 걸어갈 때마다,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의 무게를 다시 느끼곤 한다. 세월을 정신없이 살아가느라, 어느새 마음속에서 슬그머니 가벼워진 아버지의 기억의 무게를, 다시 짊어지고 걸어가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