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지선의 틈]선을 넘는 자, 누구인가
법무부 소관의 배임죄 폐지 주장에
사견까지 내며 ‘공매도 재개 욕심’
이복현의 잇따른 ‘선을 넘는’ 발언
부처 경계 넘나들며 혼선만 부추겨
게리 겐슬러 미국 증권거래위원장이 상품선물거래위원장이던 시절 미국 출장길에 그와 마주친 적이 있다. 어느 행사장에 나와 로비에서 기다리던 기자들과 만났다. 예정된 간담회도 아니었다. 기자들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성심껏 답했다. 마지막에는 “질문이 더 없냐”고 물을 정도였다. 기자들의 질문을 꺼리는 국내 관료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에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당시 한 기자가 겐슬러에게 주가지수 전망을 물었다. 여타 질문에 친절하게 답하던 그는 표정을 바꾸었다. “가격 전망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딱 잘라 말했다. 자신이 담당하지 않는 분야라면 언급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새삼 이 장면이 떠오른 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잇단 ‘선을 넘는’ 발언 때문이다.
지난 4월로 돌아가보자. 집권여당의 총선 패배 이후 윤석열 대통령과 친분이 깊다는 이 원장의 ‘용산행’설이 파다했다. 이 원장은 자신의 거취를 묻는 질문에 갑자기 물가와 금리라는 거시경제 지표를 꺼냈다. 그는 “물가라든가 금리 스케줄이 7~8월쯤이면 어느 정도 구체화될 것 같다”며 이 같은 거시경제 지표가 예측 가능해지고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연착륙 방안 등을 발표하고 난 후 자신이 물러나도 무난할 것이라 했다. 거취를 묻는데 한국은행 총재도 예단하지 않는 금리 스케줄까지 거론하며 답했다. 지난 4월은 국제유가가 널뛰고 원·달러 환율은 장중 1400원을 찍던 시기였다.
가장 큰 논란과 혼선을 일으킨 발언은 공매도 재개 여부였다. 이 원장은 지난 5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투자설명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다음달 하순 전 공매도 재개 여부에 대해 말씀드릴 것”이라며 “개인적 욕심으론 6월에 전면 재개하거나 일부라도 재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매도가 재개될 거란 신호로 받아들인 투자자들은 들썩였다. 대통령실은 “이 원장의 발언은 개인적 희망”이라며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불법 공매도 차단 시스템을 개발하고서 공매도를 재개하겠다고 한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공매도 재개를 결정하는 기관은 금융위원회다. 금융위는 지난 13일 임시 금융위 회의를 열고 내년 3월까지 공매도 금지를 연장하겠다고 결정했다. 물론 이 원장도 공매도 재개 여부를 의결하는 위원에 속한다. 이 결정이 난 다음날에도 이 원장은 사견을 전제로 ‘공매도 재개 욕심’을 또 밝혔다. 공직자가 사견을 이처럼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드러낸 모습은 이례적이다. 정책당국자에게 사견이 따로 있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건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서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까지 확대하자는 상법 개정안에 재계가 반발하자 이 원장은 지난 14일 갑자기 예정에 없던 간담회를 열었다. 그러면서 배임죄 폐지를 주장했다. 배임죄를 둘러싼 논쟁이 어제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 또한 검사 시절 기업인들을 배임죄로 기소하기도 했다. 본인이 해봐서 안다는 취지였다. 배임죄 폐지를 두고 정부와 논의된 바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정부의 공식 입장은 정해진 것이 없다”고 했다. 본인 혼자 정부를 대변하는 듯한 답변이다.
중요한 건 상법 개정안과 배임죄 사안의 소관부처가 법무부라는 점이다. 관련 부처를 조금 더 넓혀도 기획재정부와 금융위다. 금감원이 상법 관련 이해당사자인지 물음표다. 이 원장은 다음주 상장사협의회 등 재계 등과 함께 상법 개정안 관련 세미나에 참석한다. 상속세 개편도 세미나 의제 중 하나다. 금감원장이 이번엔 상속세 개편마저 언급할지도 모른다.
사실 ‘보통의 관료’라면 이처럼 거침없이 부처의 경계를 넘나들며 발언하기 쉽지 않다. 세간에선 이 원장이 윤석열 대통령과 친분이 깊어 거침이 없다고들 말한다. 친분관계를 떠나서라도 이 원장의 스타일 자체는 한국 관료사회에 ‘없던 캐릭터’다. 소신 있고 자신 있는 태도는 공직자로서 바람직하다. 너무 수세적이어선 안 되지만 그 자신감이 담장 벽을 넘어서는 건 다른 문제다. 이미 그의 발언들은 혼선을 야기하고 있다. 저돌적 면모는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금감원은 금융위 설치법상 은행, 증권, 보험사 등을 검사·감독하는 기관이다. 최근 은행 등에서 금융사고가 잇따라 일어났다. 감독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는가.
임지선 경제부 차장 vis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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