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숨의 위대한 이웃]‘오늘도 함께 기도하는’ 강영희·강진규 부자

김숨 소설가 2024. 6. 1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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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해야 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영희씨(청산 스님, 1946년생)는 아침 5시면, 그리고 저녁 5시면 어김없이 부처님 앞에 앉아 기도한다. 아침에는 일본말로 불경을 외우며 기도하고, 저녁에는 한국말로 천수경과 화엄경을 외우며 기도한다. 나이 탓에 부쩍 자주 깜박하는 그가 결코 잊지 않는 건 기도. 기도란 “거기 있는 것.”

부모님이 경남 진주 출신으로, 진주를 고향으로 생각하는 그가 주지로 있는 보덕사(宝德寺)는 일본 나라현 이코마시에 있다. 이코마역 인근 마을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데, 제주도 출신들이 1959년에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지은 특별한 절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오사카와 나라에 이주해 살던 제주도민들은 이코마산 곳곳에 절을 짓고, 타국에서 세상을 떠난 가족들의 영혼을 모셨다. 빈집 같은 깊은 정적이 감돌지만 강영희씨가 주지로 초대되어 온 1998년까지도 보덕사는 음력 사월초파일이면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한국인 신자들로 북적였다. 일본의 절들은 양력으로 사월초파일을 지낸다.

“지금 이 절을 찾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강영희씨의 표정은 담담하고, 얼굴빛은 맑다.

사월초파일에 보덕사에 모여 함께 한국에서처럼 연등을 만들어 달고, 밥을 지어 나누어 먹었던 한국인들. 그들은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법당 한쪽에 길게 걸린 나무판에 새겨진 한국인의 이름은 500개가 넘는다.

일본인 신도들만 찾아오지만, 강영희씨는 보덕사가 여전히 한국의 절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기억하기로, 이코마산 주변엔 스무 개 넘는 한국인 절이 있었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는 일제강점기에 이코마터널을 뚫을 때 인부로 일본에 들어왔다. 오사카와 나라를 잇는 이코마터널은 일본 5대 건설회사 오마야시구미가 이코마산에 뚫은 터널. 산의 지반이 약하고 물이 많아 터널공사가 불가능했지만 건설회사는 이익을 위해 공사를 강행하며 조선인을 인부로 모집하거나 동원했다. 조선인 인부는 수천명이 동원되고, 건설회사는 이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갱 입구를 봉쇄하기도 했다. 1913년 1월26일 천장과 암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 조선인 노동자 152명이 매몰되고 많은 사상자가 나왔지만 건설회사는 그대로 매장해버렸다. 1911년 6월 시작한 이코마터널은 1914년 3월 마침내 완공되지만 그사이에도 많은 조선인 인부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후에도 사건사고가 빈발하자 일본 정부는 1964년 터널을 폐쇄한다. 현재 이코마터널은 두 개로, 그중 하나는 폐쇄했던 이코마터널을 보수, 활용해 1984년 새롭게 완성한 터널이다.

그리 밝지 않은 보덕사 운명에 대해 강영희씨는 생각지 않는다. “기도할 뿐입니다. 매일매일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로하며,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강영희씨가 스님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의 큰아버지는 시모노세키에서,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스님으로 살다 돌아가셨다. 그는 큰아버지가 주지스님으로 계시던 시모노세키의 한국인 절에서 1년 동안 수행하고 스무 살에 스님이 됐다. 스님의 신분으로 결혼을 하고 아들을 뒀다. 어느 날부턴가 그가 기도할 때 아들 강진규(1979년생)가 함께한다. 아버지를 따라 한국말로 천수경과 화엄경을 외우며 리듬과 운율을 체화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스스로 일본인이란 느낌이 더 강하지만, 보덕사가 한국의 절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은 오지 않지만 그래도 한국 절로 보존시키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든 완전히 100% 보존할 수 없습니다. 형태, 형식으로라도 보존해 이어가야 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보덕사를 존속시키고 싶습니다. 나 개인의 정체성은 일본이지만, 내가 보존하고 싶은 절은 한국 절이기 때문에 한국 스님으로서의 아버지가 갖고 계신 정체성을 이어서 가져가려 합니다. 학문으로 배운다고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일본 신자조차 찾지 않는 때가 오면 보덕사를 문화재로라도 남기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에 모셔져 있는 한국인들 때문입니다.”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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