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국방의 의무에 대한 국가의 책임
1781년 5월11일 새벽, 창경궁을 순찰하던 위장들과 부장들은 대로변 소나무에 매달려 흔들리는 시신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여명이 트는 이른 새벽, 흐릿한 형체만 보고 마음의 준비 없이 시신을 맞닥뜨렸던 터라, 이를 본 모든 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창경궁에 비상이 걸렸다. 궁궐 바로 앞에서 일어난 흉사였던지라, 이 일은 정조에게 바로 보고되었다.
조사가 진행되었다. 사망자는 전날 창경궁 수비를 위해 입직했던 병사. 그는 함께 입직했던 동료 병사와 다투다 스스로 목을 맨 것이라 보고되었다. 큰일이 아니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병조의 보고 내용이 그랬다. 그러나 스스로 목을 맬 정도의 다툼이 ‘대등한 관계’에서, 그것도 ‘우발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사망한 병사는 목숨을 버리고 싶을 만큼의 괴롭힘을 장기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툼’으로 쓰고 ‘괴롭힘’으로 읽어야 하는 상황이었고, 강한 조사와 그에 따른 처벌도 필요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는 이러한 현실과 차이가 있었다. 이 일을 기록했던 노상추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인한 조정 논의는 주로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왕의 거처를 옮기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원한 사무친 죽음이 발생한 곳이니 창경궁은 부정을 탔고, 따라서 왕의 이어(移御)는 필요한 조치라는 게 당시 조정 여론이었다. 왕에게 직언을 담당하고 있는 홍문관에서도 궁이 불결해졌으니, 빨리 이어하는 게 좋겠다고 권할 정도였다. 그런데 조정 논의가 왕의 이어 문제에 집중되자, 죽은 군사의 존재와 그에 따른 책임 문제는 슬며시 논의 대상에서 빠졌다. 책임 부서인 병조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지만 말이다.
이러한 조정 분위기를 바꾼 이는 정조였다. 그는 왕조의 새 생명 탄생을 주관하는 산실청(産室廳) 담당 관리와 호위 군사만을 교체함으로써, 이 사건을 ‘불결’과 ‘부정’ 문제로 보는 여론을 정리했다. 그리고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한 군인의 억울함을 풀고 군의 위계를 바로잡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우선 사망한 병사를 괴롭힌 동료 병사에 대해선 매우 높은 수위의 유배형을 선고했다. 나아가 이러한 사고 발생을 막지 못했던 해당 부대 위장과 부장 역시 동일한 유배형에 처하도록 했다. 사망자의 자살 이유를 동료와의 개인적 문제에서 찾는 게 아니라, 군율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조직 관리 문제로 이해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조의 처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병조(兵曹) 참지(參知)와 낭청 관리들까지 유배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병조 참지는 정3품 당상관으로, 지금의 국방부 차관보나 제2차관 정도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였다. 그런 그가 유배형에 처해질 정도였으니, 병조 실무 담당자였던 낭청 관리들 역시 처벌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정조는 전체 병조의 지휘 책임을 물어,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 판서 이연상도 파직했다. 직속 부대장부터 최고 지휘라인에 있는 모든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철저하게 ‘단 한 명의 자살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출전: 노상추, <노상추일기>)
예나 지금이나 국방의 의무는 국민으로서 져야 하는 신성한 의무이다. 그리고 이 신성한 의무를 지키기 위해 필요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군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야 하는 목숨은 국가의 안위를 지켜야 할 때로 한정되지, 막을 수 있는 사고나 상급자의 안위 등을 위해서까지 걸어야 하는 목숨은 아니다. 군인들이 국가의 안위와 보호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도록, 사고를 막고 그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국가와 조정에 있다는 말이다. 병조의 모든 지휘라인은 바로 이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조가 군에서 일어난 ‘단 한 명의 자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처럼 명확하고도 광범위하게 책임을 물었던 이유이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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