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대화와 엄격한 토론 [김민형의 여담]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매년 6월쯤이면 런던 왕립과학회에서 주관하는 젊은 과학자 연구비 선정 위원회에서 의료통계학 전문가 ㅎ 교수를 만난다. 그는 성격이 굉장히 강하고 사고가 엄밀해서 과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인상이다. 실험 과학은 통계 기반 학문인데 기존 학술지에 나오는 통계 자료의 투명성이나 해석에 대해 ㅎ 교수는 매우 부정적이다. 이 이슈는 여러 분야에서 토론 대상이 돼 온 지 오래다.
특히 심리학과 의학의 경우, 이른바 ‘재현성 위기’가 2010년께부터 공론화되면서 집중 공격을 받았다. 과학 실험 결과들이 출판 뒤에도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 의식은 이제 거의 모든 학문 분야로 퍼져 나갔다. ㅎ 교수는 이 문제들의 상당 부분이 통계학 남용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는 많은 연구자가 단순히 통계학 소프트웨어를 활용하는 데 그칠 뿐 그 이상은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과학자가 사칙 연산도 못하면서 계산기만 사용하는 꼴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실험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모든 결과 데이터를 정직하게 수집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습관이 의외로 흔하다고 말한다. 실험의 데이터 분석이 서투른 과학자는 ㅎ 교수의 가차 없는 공격 대상이 된다. 몇 년 전에는 연구비 최종 면접 전형에서 한 후보자가 울음을 터뜨린 일도 있었다. ㅎ 교수의 공격적 태도를 어떻게 보느냐와 관계없이, 세계 과학 연구의 중심지에서 생산하는 연구조차 많은 오류를 수반한다. 그런데도 이를 정정하는 과정이 과연 효율적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건 어려울 때가 많다. ㅎ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다.
대학을 포함해 많은 기관에서 사람들 사이의 권력작용에 민감해진 분위기를 고려하면 ㅎ 교수의 대화 형식은 시대에 어긋나는 면이 많다. 학문적인 담론이라 해도 격해질 경우 일종의 ‘갑질’로 인식되기 쉽고, 이는 조직, 사회 또는 학술 공동체 내에서 지위 차이가 뚜렷한 경우 더 문제가 된다. 교육 현장에서의 공격적인 언행은 비록 학업에 관한 이야기일지라도 내성적인 학생한테는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
고백하자면 나도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격한 토론을 피해 왔다. 실험 결과의 검증 같은 중대한 사안이 아니어도 경쟁을 수반하거나 갈등을 일으킬 만한 주제는 꺼리는 성향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분야를 고를 때도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박사 과정 시절에 (수학적) 초끈 이론을 공부하다가 결국 순수 수학인 산술기하로 방향을 바꿔 학위 논문을 썼는데, 당시 초끈 이론 학계의 대화 문화가 영향을 끼쳤다. 그들 중엔 엄한 이들이 상당히 많았고 이런 성향은 연구 뿐만 아니라 소통방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학회에 참석한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도 상대 논리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물론 과학적 진리를 논하는 토론은 일상적인 대화의 논리적 기준보다 훨씬 엄격해야 한다. 하지만 나처럼 사고 속도가 느리고 논쟁을 기피하는 사람은 발을 들여놓기조차 힘든 환경이었다.
관대하고 부드러운 학문적 대화와 투명하고 엄격한 과학적 기준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ㅎ 교수를 존경하지만 지금까지 그만큼 엄밀하게 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질러도 세상에 직접 해를 끼칠 확률이 작은 연구를 하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가 하면 나는 수학자여서 과학 논문에서 심각한 수학적 오류를 발견하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주류는 기적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ㅎ 교수 같은 용감한 투사들 덕분일 가능성이 높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류가 세상을 파악해 가는 과정은 흥미로우면서도 복잡하다. 오류가 발견을 이끄는 일도 많고, 정확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아니다. ㅎ 교수는 의학 연구에서 정량적 엄밀성이 결여됐다며 비판하지만 나는 성격이 자상하고 환자를 보는 눈이 세밀한 의사 선생님의 직관은 대체로 믿는다. 친절한 대화와 격렬한 토론이 아슬아슬한 평형을 유지하며 과학은 발전한다.(예전에 무서워했던 끈 이론 전문가 몇명과 그사이에 꽤 친해졌으니 나도 약간씩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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